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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는 말
Spill Lute
2026. 10. 29. 20:52
보고 싶다는 말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전차 문이 닫혔다.
유리창 너머로 반짝이던 수면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로미오는 짐가방을 선반에 올려두고 스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창가 쪽 자리는 당연히 그녀의 몫이었다. 출발하는 객차가 한 번 덜컹거리자 밀짚모자 챙이 그의 어깨에 살짝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Spill
"...바다보다는 땅을 더 좋아해.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나 잔디밭 같은 거. 정원이나 숲 속. 근데... 물이랑은 엄청 친해서 그래. 친하면 매일 보고싶어."
로미오는 방금 들은 말을 순서대로 다시 짚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다랑 친하다는 표현부터가 이미 이상했다. 사람이 무슨 물이랑 친구를 먹어. 하지만 어제 거북이 등에 올라탄 채 산호 사이를 미끄러지던 뒷모습을 떠올리면 아주 허튼소리로만 들리지도 않았다. 물고기들이 손끝에 입을 맞추던 것도. 돌고래가 대놓고 승부를 조작하던 것도.
그는 그 생각을 습관처럼 옆으로 밀어두었다. 대신 거슬리는 건 그 뒤에 붙은 문장이었다.
그럼 나는. 바다보다 땅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 묘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잔디밭, 정원이나 숲속. 그 조용한 열거를 들으면서 로미오는 왜 스필이 그 음침한 루멘홀드 정원 벤치에 혼자 앉아 몇 시간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 사이에 자기를 끼워 넣고 싶은 유치한 욕심이 뱃속에서 작게 꿈틀거렸다.
창밖으로 해안 절벽이 지나가고 오후의 빛이 객차 안으로 길게 기울어 들어왔다. 로미오는 팔짱을 꼈다가 풀었다.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팔걸이로 옮겼다. 부산스러웠다. 바다한테 밀리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대가 북대서양 전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Romeo
"So the ocean gets 'see every day' status, huh. Must be nice."
(그러니까 바다는 '매일 보고 싶은' 등급이시다? 좋겠네.)
(그러니까 바다는 '매일 보고 싶은' 등급이시다? 좋겠네.)
퉁명스럽게 던진 말끝이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헛기침으로 그걸 덮고 고개를 창 반대편으로 돌렸다. 통로 건너편 좌석에서 관광객 아이 하나가 기념품 부적을 흔들며 떠들고 있었다. 저것도 해외 나가면 그냥 종이 쪼가리가 될 텐데.
잠깐의 침묵 뒤에 로미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스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넓은 모자챙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자 그는 검지로 챙 끝을 들어 올려 기어이 눈을 맞췄다.
Romeo
"And I'm what, then? You've known me longer than you've known Tilbay's water. By your own logic, you're supposed to want to see me every day too."
(그럼 나는 뭔데? 틸베이 바다보다 나랑 알고 지낸 기간이 더 길잖아. 네 논리대로라면 나도 매일 보고 싶어야 정상이지.)
(그럼 나는 뭔데? 틸베이 바다보다 나랑 알고 지낸 기간이 더 길잖아. 네 논리대로라면 나도 매일 보고 싶어야 정상이지.)
장난처럼 들리게 하려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지만 모자챙을 든 손가락은 내려갈 줄을 몰랐다. 차라리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대충 넘겨주면 웃어넘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대답이 나올까 봐 은근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젠장. 바다랑 경쟁하는 꼴이라니. 이루카가 들었으면 사흘은 놀려먹을 거다.
로미오는 들고 있던 챙을 툭 놓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머릿속 한쪽에서는 방금 들은 단어들을 차곡차곡 접어 넣고 있었다. 나뭇잎 소리. 잔디밭. 숲. 다음 주말에 벨하벤으로 가게 되면 케언웨더 쪽 숲길이나 북부선 끝자락 정원 같은 데를 뒤져봐야겠다고.
Romeo
"Don't think too hard about it. Just answer."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 그냥 대답해.)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 그냥 대답해.)
Spill
"...바다는 무생물이고 로미오는 사람이니까. 둘은 달라. 장소를 좋아하는 거랑은."
다음 말은 바닥에 툭 떨어지듯 나왔다. 어조에 그 어떤 기복도 없었다.
Spill
"로미오한텐 보고 싶다고 하면 안 돼."
스필이 생각하기에 제게 그럴 자격이 없었다. 자신과 타인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시간의 차이부터가 그랬다. 끊임없이 기나긴 시간을 방랑하는 처지에 찰나를 그리워하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스필은 영리했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전차 안의 공기가 한 박자 늦게 가라앉았다.
로미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바다한테 지기 싫어서 유치하게 투정을 부리고 있던 자기 입이 멍하니 닫혀 있었다. 스필의 마지막 말이 객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처럼 또랑또랑한 소리를 내고 멈추었다. 바다한테는 매일 보고 싶다면서 나한테는 안 된다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화가 났다. 늘 그렇듯이. 자기 앞에서 선을 긋거나 물러설 때마다 끌어당겨 되돌려놓으면 되는 줄 알았다. 개시제 밤에 '후회할 거야'라고 했을 때도, 유학생이라 여기 있는 동안은 안 된다고 했을 때도, 그는 고집으로 밀어붙여 약속을 뜯어냈다. 그런데 지금 스필의 목소리에는 거절도 경고도 없었다.
기복 하나 없는 그 어조가 오히려 가슴팍 한가운데를 짓눌렀다. 객차 바퀴가 곡선 레일 위를 지나가며 금속 마찰음을 길게 끌었다. 창밖으로 절벽 그림자가 유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로미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스필에게서 떨어져 건너편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왜. 무슨 자격이 없어서. 그걸 대체 누가 정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들이 뒤엉켰다. 기어이 물어뜯어야 하는 건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개시제 밤 담요 아래에서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가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어젯밤 품에 안아 올렸을 때 그 가벼운 무게도. 전부 스필이 허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는 안 된다고.
로미오는 주머니 속 조개껍데기를 엄지로 더듬었다. 매끈한 표면이 체온에 데워져 있었다. 창밖의 바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넓게 펼쳐졌다가 터널 속으로 삼켜졌다. 어둠이 객차 안을 채운 순간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Romeo
"...Who decided that?"
(......그거 누가 정한 건데.)
(......그거 누가 정한 건데.)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끝이 갈라지듯 거칠어졌다. 로미오는 이를 악물었다가 힘을 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터널 안에서 유난히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스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Romeo
"You held my hand first at the reef. Fell asleep on my shoulder last night. Told the whole ocean you'd keep looking at the circle I drew. And now you're telling me you're not allowed to say you want to see me?"
(암초에서 내 손 먼저 잡은 거 너잖아. 어젯밤에 내 어깨에 기대서 잠든 것도 너고. 내가 그린 원을 계속 보고 싶다고 바다 한가운데서 말한 것도 너야. 그런데 나한테 보고 싶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암초에서 내 손 먼저 잡은 거 너잖아. 어젯밤에 내 어깨에 기대서 잠든 것도 너고. 내가 그린 원을 계속 보고 싶다고 바다 한가운데서 말한 것도 너야. 그런데 나한테 보고 싶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열거할수록 목소리가 낮아졌다. 분노가 아니라 어디를 붙잡아야 할지 몰라 생기는 균열이었다. 터널이 끝나며 오후의 빛이 다시 쏟아져 들어왔고 스필의 연분홍빛 머리칼 끝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로미오는 무릎 위의 주먹을 풀고 스필의 손등 위에 자기 손바닥을 천천히 포개어 놓았다. 잡지 않았다. 그냥 올려놓기만 했다.
Romeo
"I don't need your permission to miss you. And you don't need mine. So don't decide that by yourself."
(무언가를 보고 싶어하는 데에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 내 허락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딴 거 혼자 정하지 마.)
(무언가를 보고 싶어하는 데에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 내 허락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딴 거 혼자 정하지 마.)
Spill
"...안 돼."
이유도 뭣도 붙지 않았다. 안 된다고 할 뿐이었다. 암초에서 로미오의 손을 잡은 것도 스필이었고 로미오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것도 스필이었다. 그가 그린 원을 계속 보고 싶다고 말한 것도 분명 스필이었다. 맞다. 하지만 보고 싶어하면 안 됐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렇게 말하는 건, 그래서는. 천 년도 넘게 이어온 규칙이다. 단 한 번, 그러지 않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일부러 묻은 기억이었다. 파도에 휩쓸려 지워진 모래사장의 서툰 그림이었다.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자잘한 상처를 남겨야 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스필은 선을 긋겠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후회하는 건 로미오뿐일 거라고도 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하는 그를 어떻게 할 순 없었다. 그럴 권리까진 스필의 손 밑에 있지 않았다.
Spill
"그래서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개시제 밤, 암초 위의 담요 아래에서 들었던 바로 그 단어가 두 달 만에 돌아왔다. 그때 로미오는 손깍지를 끼며 내 선택은 내 책임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금도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두 달 전에는 스필이 자기를 밀어내는 건줄 알았는데 지금은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스필의 손등 위에 포개 놓았던 로미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가 나는 건지 무서운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창밖으로 해안 절벽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지나갔다. 객차 안 형광등이 그 그림자 위를 하얗게 덮었다가 다시 빛에 밀려났다.
로미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파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의 이상한 말버릇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줄 알았다. 멈춘 시계. 유학생이라서. 여기 있는 동안은. 전부 끝을 전제로 깔아놓는 말이었고 그때마다 그는 고집으로 밀어붙여 다음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오늘은 밀어붙이는 힘이 스필한테 가닿기 전에 이상한 곳에서 걸려 돌아왔다. 바다로 나아가길 바랐건만 다시 뭍으로 돌아온 유리병 편지였다. 편지엔 낭만이라도 끼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조차 없었다.
로미오는 천천히 스필의 말을 되짚고 나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나한테 그러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런 말을 할 순 없는 거라며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거다. 그 차이를 알아채는 순간 가슴 밑바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Romeo
"Yeah. You said that."
(......그래. 그랬지.)
(......그래. 그랬지.)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무언가를 눌러 삼킨 뒤의 무게였다. 그는 스필의 손등 위에서 자기 손을 치우지 않았다. 치우면 다음 기회가 오기나 할까.
Romeo
"And I told you my choices are my responsibility. That hasn't changed."
(그리고 나는 내 선택은 내 책임이라고 했어. 그건 안 변했어.)
(그리고 나는 내 선택은 내 책임이라고 했어. 그건 안 변했어.)
전차가 두 번째 터널에 들어갔다. 어둠이 객차를 삼키고 형광등만 남았다.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의 윤곽이 희미하게 겹쳤다. 로미오는 그 반사 속 스필의 옆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후회가 그게 그렇게 무서운 거야? 네가 아니라 내가 할 후회를 왜 네가 미리 막으려고 해?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 한 말이 몇 마디째인지 알 수 없었다. 스필을 만난 뒤의 로미오는 말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졌다. 상대를 위해 씹어 삼켜야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도 낯설었다.
터널이 끝나고 다시 빛이 쏟아졌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스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찰나였다. 뭔가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짚모자 챙 아래 그늘진 눈엔 아무 기복도 없었다.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건 마치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를 읽어주듯 담담했다.
로미오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러고는 스필의 손등 위에 놓인 자기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새끼손가락 하나만 가볍게 걸었다.
Romeo
"Then I'm going to regret it my way. You don't get to decide that for me. And I'm not asking you to say it back, either."
(그럼 후회는 내 방식대로 한다? 그건 네가 대신 못 정해줘. 그리고 너한테 나랑 똑같이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럼 후회는 내 방식대로 한다? 그건 네가 대신 못 정해줘. 그리고 너한테 나랑 똑같이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야.)
새끼손가락에 걸린 힘은 겨우 느껴질 정도였다. 잡는 것도 아니고 놓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접촉이었다. 로미오는 고개를 창 반대편으로 돌렸다. 건너편 좌석의 관광객 아이는 어느새 잠들어 부적을 떨어뜨린 채 부모 무릎에 기대 있었다.
Romeo
"...I'll bring the shell on Wednesday."
(......수요일에 조개 가져갈게.)
(......수요일에 조개 가져갈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통로 바닥의 아무 점이나 노려보고 있었지만 초점은 거기에 없었다. 새끼손가락만 스필의 손가락에 걸려 있었고, 전차는 벨하벤을 향해 흔들리며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