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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아?
Spill Lute
2026. 10. 30. 19:49
아무렇지도 않아?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Spill
"...응. 책은 평일에 읽으면 돼. 방학이라 읽을 시간 많아."
토요일 약속은 생각보다 싱겁게 손에 들어왔다. 책은 평일에 읽으면 된다는 대답에 로미오는 이겼다는 듯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방학이라 시간이 많다는 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 그 많은 시간 중에 주말은 전부 내 거라는 소리잖아.
그가 슬쩍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싸 쥐었다. 어젯밤 잠을 설쳐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스필의 손목에서 전해지는 미지근한 온기가 닿자 눈 밑의 묵직한 피로가 신기하게도 가시는 기분이었다.
Spill
"로미오."
그런데 이름이 불렸다.
짧게 끊어 부르는 목소리였다. 로미오는 잡고 있던 손목에서 시선을 들었다. 지는 해의 빛이 스필의 연분홍 머리칼 끝에 걸려 있었고, 금빛 눈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Spill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냐니. 뭐가.
로미오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몇 갈래로 갈라졌다. 첫째, 지금 잡은 손목. 엄지와 중지가 넉넉하게 겹치고도 남는 그 가느다란 뼈마디가 새삼스럽게 손바닥 안에서 또렷해졌다. 둘째, 일요일 전차. 보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고, 후회할 거라고 선을 긋던 그 목소리. 그리고 그 뒤로 사흘 동안 서로 한 글자도 보내지 않았던 단말기의 새까만 화면.
셋째는 조금 더 고약했다. 스필은 감응 특화였다. 혹시 지금 그의 눈 밑에 내려앉은 밤샘의 여파를,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데서 울렁이는 무언가를 읽은 건 아닐까. 손목을 붙든 손끝이 저도 모르게 아주 조금 굳었다.
아니야. 쟤는 함부로 안 읽어. 등대에서도 먼저 물어봤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남는 건 결국 지난주 일요일이었다. 로미오는 손목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엄지로 맥이 뛰는 자리를 한 번 꾹 눌렀다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힘을 풀었다. 저녁 바람이 언덕 아래에서 올라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틈을 훑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머리 위에서 길게 사락거렸고, 스필의 손목에 감긴 남색 주머니 끈이 그의 손등을 간질였다.
Romeo
"What, this? Your wrist is so thin I could snap it with two fingers. That's the only thing bothering me right now."
(뭐, 이거? 네 손목 존나 가늘어서 손가락 두 개로도 부러뜨리겠다. 지금 신경 쓰이는 건 그거 하나야.)
(뭐, 이거? 네 손목 존나 가늘어서 손가락 두 개로도 부러뜨리겠다. 지금 신경 쓰이는 건 그거 하나야.)
거짓말이었다. 반쯤은. 로미오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스필의 눈높이로 얼굴을 내렸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금빛을 붙잡았다.
Romeo
"And if you mean Sunday, no. I'm not fine with it. I just don't plan on doing what you told me."
(일요일 얘기면, 아니. 아무렇지 않은 거 아니야. 그냥 네가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 없을 뿐이지.)
(일요일 얘기면, 아니. 아무렇지 않은 거 아니야. 그냥 네가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 없을 뿐이지.)
Spill
"...그러면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잡고 있던 손목이 빠져나갔다.
힘을 주지 않은 건 로미오 쪽이었다. 스필이 빼면 항상 그랬다. 잡는 건 자기 맘이지만 놓는 건 스필 맘이었다. 그 규칙을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텅 빈 손바닥 위에 맥박의 잔상이 남아 있으면 기분이 개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짜로?
등을 돌리는 흰 린넨 원피스의 뒷자락이 저녁 바람에 한 번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그 작은 등이 이미 정문의 철창 그림자 안쪽으로 반 걸음 들어가고 있었다. 남색 천 주머니가 가는 손목에서 진자처럼 흔들렸다. 자기가 사흘 밤을 깎아서 넣은 파도 소리가 저 안에 담겨 있다. 그 사실을 스필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간다.
로미오는 한 발짝도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빈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손끝이 주머니 안감 깊숙이 파고들어 주먹이 됐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정리해버린 그 한 마디가 턱 밑에 걸려서 씹히지도, 삼켜지지도 않았다. 씨발, 이게 맞냐. 그냥 닫아버리면 나는 뭘 하라는 건데.
그런데 화가 나는 건지 아닌지 자기도 모르겠다는 게 더 화가 났다. 누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스필은 물었고, 로미오는 대답했고, 스필은 됐다고 했다. 완벽하게 매끈한 대화였다. 모난 데가 없으니 발을 걸 곳조차 없는, 그런.
Romeo
"Spill."
(스필.)
(스필.)
그 부름은 반사되듯. 낮은 목소리가 벨하벤의 돌담 사이를 짧게 울렸다. 스필의 발소리가 멈추든 안 멈추든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한 손을 꺼내며 목덜미를 세게 긁었다. 귓바퀴가 아직 뜨거웠다.
Romeo
"Saturday. Two o'clock. I'm not asking — I'm confirming."
(토요일. 두 시. 묻는 거 아니야, 확인하는 거야.)
(토요일. 두 시. 묻는 거 아니야, 확인하는 거야.)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추궁하려 드는 건 일요일에 자기가 한 말을 제손으로 깨는 거였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놓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은 굴뚝 같아도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정문 앞 상시등 불빛 아래 서서, 스필의 작은 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서면 솔트로우행 막차까지 20분. 언덕을 내려가는 계단의 돌 모서리가 밤이슬로 번들거렸고, 어디선가 비둘기가 꽁지로 바닥을 쓸며 사라지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루멘홀드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빈 손바닥이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