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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

Spill Lute 2026. 11. 3. 04:59
허세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orning drill was nothing, by the way. Just holding up a barrier against some waves for three hours. I could do that in my sleep."
(그나저나 오전 실습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냥 세 시간 동안 파도 막는 결계 세워둔 게 다야. 자면서도 해, 그 정도는.)
점심을 굶어서 초콜릿으로 때운 주제에 허세는 여전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란히 앉아 물 냄새를 맡고 있으니 실제로 소모의 피로가 조금씩 가시는 기분이었다. 스필과 가까이 있으면 유독 회로가 빨리 가라앉는 그 이상한 감각이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Spill
"로미오, 허세 안 부려도 돼. 아까 손 잡았을때... 조금 차가운 거 알았어. 그러니까 거짓말이야."
점심도 굶고 세 시간 내내 파도를 막아낸 직후라 손끝이 서늘했던 걸 본인은 감쪽같이 숨긴 줄 알았다. 초콜릿 하나 까먹고 시치미를 뚝 떼면 모를 줄 알았는데, 스필 루테는 감응을 쓰지 않고도 맨살이 닿은 것만으로 귀신같이 알아챘다.
로미오의 얼굴이 목덜미부터 귓바퀴 끝까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자면서도 할 수 있는 훈련이라고 큰소리친 지 삼십 초도 안 돼서 바닥까지 털렸다.
누구 앞에서 약한 소리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어야 말이지.
머로 가문에서는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무능하다는 뜻이 됐다. 솔트포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을 쉬고 돌아온 놈이 고작 해안 방어 실습 따위에 숨이 차서 손이 식었다고 티를 내면, 당장 대표팀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수군거릴 게 뻔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는 게 몸에 밴 지 오래였다.
하지만 스필에게 비웃는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도서관 책장을 넘기듯 담백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변명할 구멍이 없었다. 화를 내며 일어설 수도 없고, 아니라고 박박 우길 수도 없었다. 로미오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시선을 돌려 연못 위 수련 잎사귀를 노려보았다.
Romeo
"It wasn't because of the drill. The water in that stupid moss tank was just cold, that's all."
(실습 때문 아니거든. 그냥 아까 그 바보 같은 이끼 수조 물이 차가웠던 거야, 그게 다야.)
세상에서 제일 구차한 핑계가 기어 나왔다. 아까 그 열대림 수조 물은 미지근하다 못해 따뜻했다. 뱉어놓고도 자기가 한심해서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는 한숨처럼 거친 숨을 훅 내쉬더니, 세우고 있던 무릎을 마저 접고 나무 데크 난간 기둥에 등을 푹 기댔다. 꼿꼿하게 세워두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지자 오전 내내 뭉쳐 있던 등 근육이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에라 모르겠다. 들킨 마당에 폼 잡아서 뭐 하냐.
로미오는 난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오른손을 스필이 앉아 있는 재킷 자락 쪽으로 슬그머니 뻗었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얹혀 있던 스필의 왼손을 찾아 아무 말 없이 다시 덮어 쥐었다. 이번에는 끌고 가려고 잡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기 손바닥의 서늘한 기운을 스필의 미지근한 체온에 가져다 대는 것에 가까웠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살결을 맞대고 있으면 뼛속에서 맴돌던 소모의 한기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방에 두고 온 불법 토끼 인형보다 백배는 효과가 좋았다.
Romeo
"Fine. Since you want to stay here anyway, I'm sitting for ten minutes. Don't move your hand. You're warmer than that dumb rabbit."
(알았어. 어차피 네가 여기 더 있자고 했으니까 딱 십 분만 앉아 있는다. 손 빼지 마. 그 멍청한 토끼보다 네가 더 따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