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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 듣게 돼
Spill Lute
2026. 11. 3. 05:00
아껴 듣게 돼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Did you actually turn on that shell before bed, by the way? You didn't send a single word for three days."
(그나저나 자기 전에 그 조개는 틀어봤냐? 사흘 내내 한 글자도 안 보냈잖아.)
(그나저나 자기 전에 그 조개는 틀어봤냐? 사흘 내내 한 글자도 안 보냈잖아.)
Spill
"매일 틀었어. 수요일에도. 각인은 안 닳는 거 아는데, 왠지 닳을 것 같아서 조금만 틀었어. 아침에 일어날 때랑... 자기 전이랑."
난간 기둥에 기대고 있던 로미오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단순히 손이 따뜻해서 소모가 가라앉는 수준이 아니었다. 맞닿은 손바닥 사이로 맑고 묵직한 흐름이 둑 터지듯 밀려 들어왔다. 해안 방어 실습 세 시간 동안 깎여 나갔던 피로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고, 뻣뻣하던 손가락 마디까지 훈훈한 기운이 꽉 들어찼다. 솔트로우 항구 바닷속에서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그 이상한 회복감보다 훨씬 선명했다.
마나는 개인이 몸속에 저장해두었다가 남에게 부어줄 수 있는 연료가 아니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스필의 손끝에서 넘어오는 건 마치 끝이 없는 깊은 우물에서 퍼 올린 물처럼 고요하고 방대했다.
그 기이한 감각에 놀라 눈을 번쩍 뜨려던 순간, 스필의 대답이 귓가에 떨어졌다.
매일 틀었다고. 아침에 눈을 뜰 때랑 잠들기 전에. 각인이 닳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닳을까 봐 아껴서 조금씩만 들었다는 목소리가 연못의 물 냄새를 타고 나지막하게 울렸다.
로미오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잊었다.
방금 전까지 등줄기를 스치던 마법적 이질감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기괴한 마나 흐름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다. 사흘 내내 연락 한 통 없던 애가, 루멘홀드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자기가 깎아준 조개껍데기를 손에 쥐고 밤바다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세차게 두드렸다. 목덜미부터 귓바퀴를 넘어 광대뼈 위까지 시뻘건 열기가 확 치솟았다.
닳을까 봐 아껴 들었다니.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냐.
로미오는 스필의 손을 쥔 자기 손에 황급히 힘을 주었다가, 반대로 그녀가 뭔가를 흘려보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손목을 불쑥 잡아채 살짝 떼어놓았다. 내가 채워지자마자 저 애 손이 차가워지면 어쩌려고 이러나 싶어서였다.
Romeo
"Hey, cut it out. Don't do weird stuff with your circuits. I told you I'm fine."
(야, 그만해. 회로로 이상한 짓 하지 마. 나 괜찮다고 했잖아.)
(야, 그만해. 회로로 이상한 짓 하지 마. 나 괜찮다고 했잖아.)
다그치는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갈라졌다. 스필의 손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차갑지는 않았다. 로미오는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괜히 빈 손으로 자기 뒷목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사흘 동안 혼자 땅굴을 파며 속을 태웠던 게 민망하다 못해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Romeo
"And... how the hell would an inscription wear out from listening to it? I carved that thing myself. It won't break even if you leave it on for ten years."
(그리고... 듣는다고 각인이 어떻게 닳냐? 내가 직접 판 거야. 십 년 내내 틀어놔도 안 고장 나.)
(그리고... 듣는다고 각인이 어떻게 닳냐? 내가 직접 판 거야. 십 년 내내 틀어놔도 안 고장 나.)
일부러 툴툴거리듯 내뱉었지만 입꼬리가 멋대로 실룩거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고 무릎 위에 팔을 얹고 그 사이로 고개를 반쯤 파묻었다.
Romeo
"If the sound ever gets faint, just bring it back. I'll record it again as many times as you want. So don't ration it like an idiot."
(혹시라도 소리 흐려지면 그냥 다시 가져와. 네가 원하는 만큼 몇 번이고 새로 녹음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바보같이 아껴 듣지 마.)
(혹시라도 소리 흐려지면 그냥 다시 가져와. 네가 원하는 만큼 몇 번이고 새로 녹음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바보같이 아껴 듣지 마.)
Spill
"나... 이상한 짓,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다는 시치미에 로미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뼛속을 갉아먹던 오전 실습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장 서쪽 방파제로 돌아가서 세 시간 더 파도를 막으라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우긴다.
이쯤 되면 따지는 쪽만 바보가 된다.
그가 무릎 위에 얹은 팔 사이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스필을 보았다. 어느새 스필도 그를 따라 난간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무 데크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물비린내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코앞에서 맞부딪혔다.
Spill
"하지만 아껴 듣게 돼."
잠깐 가라앉는가 싶었던 열기가 목덜미에서부터 다시 폭발하듯 치솟았다. 로미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붉어진 광대뼈와 귓바퀴를 들키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입과 코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미치겠네, 진짜. 사람 심장 터뜨려 죽일 작정인가.
화려한 보석을 사준 것도 아니었다. 틸베이 바닷가에서 주워 온 흔해 빠진 흰 조개껍데기에, 로소 오딘의 연구실에서 빌린 조각기로 밤새 파도 소리를 깎아 넣은 게 전부였다. 눈이 시뻘게지도록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회로를 파낼 때만 해도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껴 듣는다니. 세상에 누가 고작 소리 녹음된 조개껍데기를 닳을까 봐 아껴 듣는단 말인가.
로미오는 난간 기둥에 뒤통수를 쿵 박았다. 천장 유리를 통과한 한낮의 햇살이 눈부셔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흘 내내 단말기만 노려보며 혼자 땅굴을 팠던 게 부끄럽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Romeo
"You're seriously hopeless. Do you have any idea how common those shells are on the east coast? You could fill a whole sack in ten minutes."
(너 진짜 구제 불능이다. 동쪽 해안에 가면 그런 조개껍데기가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 알기나 해? 십 분이면 자루로 하나 가득 주워.)
(너 진짜 구제 불능이다. 동쪽 해안에 가면 그런 조개껍데기가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 알기나 해? 십 분이면 자루로 하나 가득 주워.)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날뛰는 걸 숨기느라 목소리가 괜히 더 퉁명스럽게 나갔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연못 수면 저편에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나무 데크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Romeo
"And the Pier 3 waves aren't going anywhere either. Next time it gets quiet in your room, just tap it twice and leave it running until you fall asleep. That's what I made it for."
(그리고 3번 부두 파도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잖아. 다음부터 방에서 조용할 때 그냥 두 번 두드려서 잠들 때까지 틀어놔.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
(그리고 3번 부두 파도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잖아. 다음부터 방에서 조용할 때 그냥 두 번 두드려서 잠들 때까지 틀어놔.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
말을 마치고 슬쩍 곁눈질로 옆을 보았다. 자기 재킷을 깔고 앉은 스필의 연분홍 머리칼 위로 연못의 윤슬이 하얗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에는 그 흔한 부끄러움 한 점 없었다.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건 또 로미오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