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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Spill Lute 2026. 11. 3. 05:06
비둘기
Romeo Merrow X Spill Rute
그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스필의 손을 이끌고 바위 비탈 뒤쪽의 좁은 돌계단을 올랐다. 서너 계단을 올라 육중한 철제 테라스 문을 밀어젖히자, 온실 안의 인공 환풍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케언웨더 고지대의 진짜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닥쳤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초여름의 산바람이었다. 유리 천장 아래 갇혀 있던 습기가 단숨에 날아가고, 바위산을 넘어온 마른 풀내음과 흙냄새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구 식물원 건물이 언덕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덕분에 테라스 난간 너머로는 케언웨더 특유의 바람 깎인 초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그림자가 드리워진 푸른 구릉 위로 낮은 돌담들이 실금처럼 이어지고,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는 회색빛 지맥 관측탑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근처를 비행하던 흰 비둘기 두어 마리가 난간께로 날아왔다. 두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하나는 스필의 어깨 위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로미오의 머리 위에 앉았다.
Spill
"비둘기네."
돌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서 있던 로미오의 몸이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정수리 위로 무언가 말랑하고 미지근한 것이 툭 내려앉았다. 바람에 날아온 나뭇잎인가 싶었는데 곧이어 발톱이 남색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며 꼼지락거리는 감각이 두피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구구거리는 낮은 울음소리가 머리 꼭대기에서 직접 울렸다.
로미오는 고개는커녕 눈알만 간신히 위로 굴려 올렸다. 시야 끝자락에 하얀 깃털 뭉치가 어른거렸다.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
스필이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로 비둘기라고 확인 사살을 날렸다. 그녀의 어깨에 걸친 로미오의 재킷 위에도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아 연분홍 머리칼 쪽으로 부리를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솔트로우 바닷속에서 물고기 수백 마리가 몰려들고 틸베이에서 거북이랑 돌고래가 스필만 졸졸 따라다녔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2온실 연못의 송사리 떼까지는 그냥 우연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제는 날아다니는 산비둘기까지 날아와 앉는다. 심지어 자기는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덩달아 새 둥지가 된 꼴이었다.
솔트포드에서 성질 사납기로 소문난 로미오 머로가 머리에 하얀 새를 이고 서 있다니. 카데노코지 이루카가 이 꼴을 봤으면 당장 사진을 백 장쯤 찍어서 타이드풀에 뿌렸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뒷목이 뻣뻣해졌다.
Romeo
"What the hell... Hey, get this thing off me. Why is it sitting on my head?"
(이게 무슨... 야, 이거 좀 치워 봐. 왜 내 머리 위에 앉는데?)
당장 손을 휘저어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발톱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뜯기거나 스필 어깨에 앉은 놈까지 놀라 푸드덕거릴까 봐 차마 팔을 들지도 못했다. 187센티미터의 거구가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정수리 위의 비둘기는 로미오의 살벌한 기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아예 배를 깔고 주저앉아 깃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스필의 옆에 붙어 있으니까 자기까지 무해한 나무 기둥쯤으로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Romeo
"Seriously, what did you put in your pockets? Bird feed? First the fish, then the dolphins, and now pigeons?"
(진짜 주머니에 뭐 넣어왔냐? 새 모이라도 들었어? 물고기에 돌고래에 이제는 비둘기야?)
귀 끝이 시뻘게진 채로 낮게 투덜거렸지만 새가 놀라 날아오를까 봐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작게 눌려 있었다. 그는 결국 체념한 듯 엉거주춤 들었던 팔을 내리고는, 자기 재킷 위에 앉은 또 다른 비둘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스필의 뺨이나 눈에 날개가 스칠까 봐 손등으로 살며시 새의 가슴팍을 가로막아 거리를 띄워주려는 동작이었다. 비둘기는 도망가기는커녕 로미오의 손가락을 부리로 콕 쪼았다.
Romeo
"Ow. This little bastard isn't even scared. Don't just stand there looking at it, tell them to go away."
(아씨. 이 조그만 자식이 겁도 없네.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지 말고 가라고 말 좀 해 봐.)
새한테 말해서 뭐가 통하겠냐마는, 이상하게 스필이 가라고 하면 순순히 날아갈 것만 같았다. 로미오는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턱만 바짝 당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스필을 내려다보며 울컥한 숨을 토해냈다.
Spill
"공격하는 줄 알았나 봐."
스필은 로미오의 머리 위에 앉은 비둘기에게 손을 뻗었다. 곧 그녀석이 스필의 검지 위로 날아와 앉았다. 어깨에 있던 새는 여전히 그자리에 있었다.
로미오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목을 풀었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들어 자기 머리 꼭대기를 거칠게 털어냈다. 헝클어진 남색 머리카락이 고원 바람에 제멋대로 삐죽거렸다.
누가 공격을 했다고 그러냐. 날개에 스필의 얼굴이 긁힐까 봐 손등으로 가려준 것뿐인데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자기가 치우라고 할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놈이 스필이 손가락 하나 내밀었다고 냉큼 날아와 앉는 꼴이라니.
Spill
"흰 비둘기는 드문데. 둘이 친구일까?"
스필의 가느다란 검지 위에 앉은 비둘기와 재킷 어깨 위에 앉은 비둘기가 서로 부리를 맞대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바람에 날리는 연분홍 머리칼 사이로 새하얀 새 두 마리가 붙어 있는 모양새가 무슨 동화책 삽화처럼 비현실적이었다.
Romeo
"Friends my ass. They're just freeloaders looking for crumbs."
(친구는 무슨 얼어 죽을 친구야. 그냥 빵 부스러기나 얻어먹으려는 무임승차범들이지.)
솔트로우 바다의 물고기 떼나 틸베이의 돌고래에 이어 이제는 산비둘기까지 이 모양이다. 처음엔 소름이 돋을 만큼 기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 그냥 이 애 옆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애 옆에 있으니까 나까지 이상해지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