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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로_2

Spill Lute 2026. 10. 26. 00:51
심해로
Romeo merrow X Spill Rute
등 뒤에서 옷자락이 당겨졌다. 아주 가벼운 무게였다. 잡아끄는 힘도, 붙잡으려는 다급함도 없이 그저 손끝을 얹은 정도. 그런데도 로미오는 계단 두 칸을 내려가다 말고 발을 멈췄다. 검은 물이 이미 부츠 옆구리를 적시고 있었고, 무릎 아래로는 젖은 돌의 미끈한 감촉이 올라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저 손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제 옷자락을 쥐고 있는지 확인하게 될 터였고,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젠장. 같이 물에 들어간다고 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사람이었다. 위험하다는 소리도, 무섭다는 소리도, 물어봐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 한 칸을 남겨두고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옷을 붙들었다.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허락을 내주지도 않는, 그냥 거기 있겠다는 표시. 로미오는 그 표시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Romeo
"Don't tug it. This jacket costs more than your coat."
(당기지 마. 이 재킷이 네 코트보다 비싸.)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옷자락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반 걸음 옆으로 비켜서서 그녀가 계단 폭에 발을 디딜 자리를 만들었다. 미끄러운 석재 위, 그가 먼저 내려가 물속에 발을 담그고 단단히 버텼다. 물이 발목을 넘어 종아리를 삼켰다. 차갑다기보다 무거운 감각이었다. 소금기와 오래된 콘크리트 냄새가 올라왔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오른손을 물 밖으로 들어 올렸다. 손끝이 공기를 훑으며 음절을 그렸다. 성 방식은 형태를 그리지 않는다. 소리가 곧 형이 된다. 그는 입술을 크게 벌리지 않고 짧게 내질렀다.
Romeo
"Dros. Venn. Ith."
〔결. 심. 항.〕
한 음절마다 차가운 공기가 얇게 갈라졌다. 첫 음절에서 부두 가장자리를 따라 반투명한 판이 수면에 눕듯 깔렸다. 둘째 음절에서 그 판이 접혀 아래로 밀려 들어가며 물의 부피를 밀어냈다. 셋째 음절에서 텅 빈 물기둥이 완성됐다. 발밑의 검은 바다가 사라지고, 석재와 모래와 아직 젖은 계단이 드러났다. 그들 둘만을 감싼 마른 우물 하나가 바다 속에 서 있었다.
팔을 내리자 손끝이 시렸다. 익숙한 소모의 시작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 보이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감각은 아직 돌아온다. 괜찮다. 이 정도는 아침에 물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Romeo
"Main ward's up. It breathes with us, so don't hold your breath. Walk slow. And keep holding on if you want. It's driving me insane, but it's better than you floating off."
(주 결계 올렸어. 우리 숨에 맞춰 늘어나니까 숨 참지 마. 천천히 걸어. 계속 붙들고 있고 싶으면 그래. 미치겠지만, 네가 떠내려가는 것보단 낫지.)
그는 젖은 계단을 한 칸 더 내려섰다. 결계 안쪽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파도 소리가 벽 바깥에서만 둔탁하게 맴돌았다. 그는 뒤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 손을 잡으면 옷자락을 쥔 그 작은 손이 떨어질 테니까.
Romeo
"Come on. You wanted the real thing."
(와. 진짜를 보고 싶다며.)
스필이 로미오의 옷자락을 놓았고, 다음 순간엔 로미오의 손을 잡았다.
Spill
"길 잃으면 안 되니까."
도통 어디에 잃을 길이 있다는 건진 몰라도.
Spill
"결계. 이것도 신기해."
옷자락이 먼저 가벼워졌다.
로미오는 그 변화를 등으로 알았다. 얹혀 있던 무게가 사라지자 이유 모를 허전함이 견갑골 사이로 훅 끼쳐 들었다. 뭐야, 벌써 질렸냐.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반쯤 돌리려던 찰나였다.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제 손에 차갑고 작은 손가락이 엉겨 들었다.
발이 계단 끝에서 멎었다.
결계 벽 너머에서 파도가 둔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갑자기 아주 멀어졌다. 손바닥 안쪽에 닿은 피부는 바닷바람을 맞고 온 탓에 서늘했고, 그 서늘함은 손금의 골을 따라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다. 길을 잃는다니. 앞뒤로 계단 하나뿐인 마른 우물 속에서 무슨 길을 잃는다는 건지. 말 같지도 않은 핑계였다. 그런데 그 말 같지도 않은 핑계가 제가 지난주에 늘어놓던 것들과 꼭 닮아 있다는 사실이 로미오를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Romeo
"Lose your way? Here. In a hole with one staircase."
(길을 잃어? 여기서. 계단 하나 있는 구멍에서.)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갈라졌다.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쥐는 힘을 아주 조금 고쳤다. 손가락 마디가 서로 어긋나지 않게, 미끄러운 돌 위에서 한쪽이 휘청여도 끌려 넘어지지 않게. 벌워크 훈련장에서 수없이 반복한 구조 파지법이었다. 그렇게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결계가 신기하다는 말이 뒤따라왔다. 로미오는 대꾸 대신 하네스 옆구리에 매달린 작은 상시등을 엄지로 눌러 켰다. 희부연 빛이 반경 몇 걸음만큼 번지자 그들을 둘러싼 벽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 바깥의 바다는 검은 유리처럼 서 있었다. 그 표면에 빛이 닿자 안쪽으로 떠다니던 미세한 부유물들이 은가루처럼 반짝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손가락 길이만 한 은빛 물고기 몇 마리가 벽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빛에 놀라 흩어졌다. 우물 바닥은 젖은 모래와 굴 껍데기로 거칠었고, 계단의 마지막 몇 칸에는 백 년쯤 묵은 해초가 녹색 머리카락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Romeo
"It's just a ward. Folded plane, pushed volume. Stop saying everything's amazing before you even see the good part."
(그냥 결계야. 접은 면으로 물 부피를 밀어낸 거. 좋은 건 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다 신기하다고 하지 마.)
퉁명스러운 말끝과 달리 그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선 뒤 한 걸음을 떼고, 손끝에 걸린 무게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음 걸음을 뗐다. 결계는 그의 걸음에 맞춰 앞쪽으로 천천히 늘어났다. 등 뒤로는 그만큼 바다가 다시 닫히며 낮게 물을 삼켰다. 꿀렁, 하는 소리가 귀 바로 뒤에서 울릴 때마다 맞잡은 손이 미묘하게 따끔거렸다. 손끝이 시린 건 소모 탓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몇 걸음 앞, 상시등 빛이 닿는 가장자리에 무언가가 희게 걸렸다. 결계 벽 너머 물속에 반쯤 잠긴 거대한 아치였다. 풍화된 돌 위로 조개가 다닥다닥 앉아 있었고, 아치 정수리에는 지금은 아무도 읽지 않는 옛 각인이 이끼에 덮인 채 남아 있었다. 구 성문이었다. 이 부두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로미오는 그 앞에서 멈춰 서서 상시등을 조금 높이 들었다. 시선은 아치에 두었다. 옆을 보면 지금 제 얼굴이 어떤 꼴인지 들킬 것 같았다.
Romeo
"That's the old gate. Sank with half the harbor two hundred years ago. Now say amazing."
(저게 옛 성문이야. 이백 년 전에 항구 절반이랑 같이 가라앉았지. 자, 이제 신기하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