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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등대에서
Spill Lute
2026. 10. 26. 00:56
버려진 등대에서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로미오는 스필의 손을 잡은 채, 렌즈를 둘러싼 좁은 철제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발밑의 격자무늬 바닥 너머로 아찔하게 아래층이 내려다보였다. 그는 소금기와 해무에 뿌옇게 변한 유리창 앞에 섰다.
Romeo
"This is the best part. Not the squeaky stairs or the whining wind."
(이게 진짜지. 삐걱거리는 계단이나 징징대는 바람 말고.)
(이게 진짜지. 삐걱거리는 계단이나 징징대는 바람 말고.)
그는 깍지 낀 손을 주머니에서 빼냈다. 그리고는 스필의 손을 놓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어 제 손바닥을 유리창에 가져다 댔다. 그의 손바닥과 유리창 사이에 그녀의 손등이 놓였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과 그의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손을 동시에 감쌌다.
Romeo
"Vindico."
[정화.]
[정화.]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투명한 파동이 번져나가자, 소금기와 먼지로 뒤덮여 있던 거대한 유리창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마치 가려져 있던 장막이 걷히는 것처럼, 솔트로우 항구의 전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분주하게 오가는 화물선들, 부두를 따라 늘어선 크레인, 멀리 보이는 솔트포드 인스티튜트의 유리 건물과 그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까지.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바람이 등대의 꼭대기를 휘감으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두꺼운 유리창 안은 고요했다. 로미오는 스필의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은 채,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항구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Romeo
"Better than a ghost, right?"
(귀신보다 낫지?)
(귀신보다 낫지?)
Spill
"...응."
스필은 덮인 손등에 눈길을 한 번 주고, 그대로 항구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로미오 머로는 항상 어떤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운 기분이 드는 창공, 시끌벅적한 음악이 가득한 지하, 이백년 전에 가라앉은 문명의 잔재, 벨하벤과 솔트로우가 한몸처럼 섞여 보이는 지붕 위, 그리고 이젠 수평선과 항구. 수평선. 그녀는 잠시 버릇처럼 수평선을 바라봤다. 다음으론 한 뼘 위 거리에 있는 로미오였다.
Spill
"이것도 안 잊어."
이것도 안 잊어. '도'라는 조사 한 글자가 그의 흉곽 안쪽을 정확하게 때렸다. 그는 스필의 손등을 덮고 있던 제 손바닥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넣었다. 유리창 너머 항구의 풍경이 흔들리지 않도록, 아니면 이 순간이 어딘가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처럼. 부러진 나침반의 소란도, 수몰된 부두의 어둠도,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던 벨하벤의 야경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졸업하면 기록이 될 뿐이라고, 모든 것을 종이 위의 한 줄로 치부하던 그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로미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목구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걸려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수평선에서 머물렀다. 그가 수없이 지켜본 습관이었다. 언제나 먼 곳을,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시선이 한 뼘 위의 거리를 건너 그에게로 옮겨졌다.
수평선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서 있는 자신이었다.
프레넬 렌즈의 유리 조각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벽면에 무수한 무지개 조각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 빛이 그녀의 연분홍 머리카락 끝을 엷게 물들이고 있었다. 로미오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바람 탓으로 돌리려 했지만, 등대 안은 고요했다. 유리창 너머로 갈매기가 한 마리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는 유리창에 댄 그녀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가락 끝이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는 마른 목을 한 번 넘기고, 제법 시큰둥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들킨 기분이었다. 좋아서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아직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로미오는 고개를 돌려 자신도 유리창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4월의 바다는 짙은 감색이었고, 수평선 위에 걸린 구름은 희미한 주황빛을 띠기 시작했다.
Romeo
"...You'd better not."
(…잊어버리기만 해봐.)
(…잊어버리기만 해봐.)
겨우 그만큼이었다. 거칠거나 빈정대는 톤이 아니었다. 평소 그의 목소리에 깔리는 허세와 오만함이 빠져 있었고, 남은 것은 낮고 서툰 진심뿐이었다. 그는 즉시 후회했다. 목소리가 떨렸는지 아닌지 자신도 알 수 없어서.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재킷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주머니 안쪽에서 손끝이 토끼 인형의 둥근 옆면에 닿았다. 세탁하지 말라고 악을 썼던 그 멍청한 천 뭉치가, 아직도 그의 재킷 속에 있었다.
Romeo
"When you write this one down, write the whole thing. Not just the view. The guy who dragged you up nine floors of rotten stairs to show it to you."
(이번 거 적을 때는 전체를 다 적어. 풍경만 말고. 썩은 계단 아홉 층을 끌고 올라와서 이걸 보여준 놈까지.)
(이번 거 적을 때는 전체를 다 적어. 풍경만 말고. 썩은 계단 아홉 층을 끌고 올라와서 이걸 보여준 놈까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안하거나 답답한 침묵이 아니었다. 등대 꼭대기의 공기는 먼지와 소금기와 오래된 쇠 냄새로 가득했고, 유리창 너머로 항구의 크레인들이 느릿하게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화물선 한 척이 천천히 항로를 빠져나가며 뒤에 하얀 물거품을 남겼다. 로미오는 그 배가 수평선 끝에 점처럼 작아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늘 바라보는 곳.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