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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부탁

Spill Lute 2026. 10. 26. 02:49
닫힌 부탁
Romeo Merrow X Spill Rute
이제는 볼 것도 없는 바다였다. 항구의 전차 경적이 한 번 더 멀리서 울렸다. 스필이 고개를 끄덕이자 후드에 주름이 잡혔다. 십 분 가량의 침묵이 이어졌다가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부서졌다.
Spill
"로미오,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는 말에 로미오는 고개를 반쯤 돌렸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반년 넘게 끌고 다니는 동안 이 계집애 입에서 원하는 게 나온 적은 손에 꼽았다. 솔트포드를 보고 싶다고 했던 게 거의 전부였다. 그는 그다음 말을 받으려고 어깨에 실은 무게를 슬쩍 거두었다.
다음 떨어진 말에 깃든 감정은 명명할 수 없는 종류였다. 슬픈 것 같기도 했고 무감한 것 같기도 했고, 태연하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미약한 감정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이 애매했다.
Spill
"나한테만 이러는 이유. 그건 말하지 말아줘."
그리고 들었다.
로미오의 손가락이 멎었다.
쥐고 있던 힘이 빠지지는 않았다. 더 들어가지도 않았다. 손 하나가 딱 그 모양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후드 아래 반쯤 보이는 얼굴을 봤다. 슬픈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화가 나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다는 거다. 말하지 말라는 건 무슨 말이 나올지 안다는 소리였다. 씨발, 그럼 언제부터. 밤하늘을 누볐을 때부터인가. 등대 계단에서 굴렀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처음 골목에서 줄리엣 핑계를 댔을 때부터 알고 있었나. 로미오는 목 안쪽이 뜨겁게 조여드는 걸 느꼈다. 들킨 건 상관없었다. 들켜놓고 막힌 게 문제였다.
Romeo
"...Who said I was gonna say anything."
(...누가 뭐 말한대.)
낮고 거칠게 나왔다. 부정이었다. 아무도 안 믿을 부정이었다. 그는 그걸 알면서 턱을 쳐들었다. 귀가 아까보다 더 붉었다. 이번엔 다른 이유였다.
로미오는 입을 한 번 열었다 닫았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묻는 순간 그 이유라는 게 둘 사이에 놓여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놓이면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질문을 이빨 뒤에서 꽉 물어 삼켰다. 대신 숨을 길게 뱉었다. 하얀 김이 바닷바람에 금방 찢겨 날아갔다.
Romeo
"Fine. I won't say it."
(알았어. 말 안 해.)
그가 내준 건 거기까지였다. 다음 말은 조금 늦게 나왔다. 굳어 있던 손가락이 그제야 다시 움직였다. 얽힌 손을 풀지 않고 오히려 한 마디 더 깊이 걸어 잠갔다.
Romeo
"But that's all you get. I'm not stopping. You didn't ask me to stop, so I'm not."
(근데 딱 거기까지야. 그만두진 않아. 그만두라곤 안 했잖아. 그러니까 안 그만둬.)
억지. 오늘 밤 두 번째 억지였다. 로미오는 이번에도 물리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지워달라는 부탁이었다면 어땠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후드 쪽을 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Romeo
"...And if you ever want to know, you ask. Don't guess. You're shit at guessing."
(...그리고 언젠가 알고 싶어지면 물어. 짐작하지 말고. 너 짐작하는 거 존나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