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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살 하나 사이에 두고

Spill Lute 2026. 10. 26. 02:51
창살 하나 사이에 두고
Romeo Merrow X Spill Rute
루멘홀드의 철제 정문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닫히는 순간까지 로미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그는 비로소 폐부 깊숙이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대로 돌아설 생각이었다. 얌전히 기숙사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하프타이드로 향하는 전차를 타러 내려가면 그만인 일이었다.
자갈을 밟는 발소리가 별안간 멎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멈칫하더니, 황급히 돌아섰다. 허겁지겁 되돌아 뛰어오는 발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두드렸다. 로미오는 놀라 저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얗고 작은 손이 차가운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쇠창살 틈새로 내민 얼굴은 조금 숨이 차 보였고, 달빛을 머금은 금빛 눈동자는 흐트러짐 없이 오롯이 그를 향해 있었다.
Spill
"로미오."
"오늘 즐거웠어. 농담 아니야. 정말로 안 잊어. 그건 약속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단정한 음절이 고요한 밤의 대기를 가르고 정면으로 날아와 꽂혔다. 오늘 즐거웠다고. 농담이 아니라고. 정말로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고. 망설임 없이 창살 너머로 쏟아진 그 몇 마디에 로미오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젠장, 이건 반칙이었다. 저런 얼굴로, 고작 저 몇 마디를 전하겠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와 쇠창살을 붙잡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수작질이란 말인가. 심장 부근에서 쿵 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 열기는 순식간에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귓바퀴를 집어삼켰고, 턱 끝까지 붉은 기운이 번져 나갔다. 가슴 안쪽이 사정없이 조여들며 걷잡을 수 없는 고동이 귓전을 때렸다.
로미오는 터져 나오려는 벅찬 숨을 억지로 억누르며, 굳어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젖은 자갈을 짓이기듯 세 걸음 다가가 쇠창살 바로 앞에 섰다. 차가운 쇠기둥에 이마를 짓찧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그는 스필이 붙잡고 있는 굵은 창살 바로 위쪽에 제 커다란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얼음장 같은 쇠의 냉기가 닿았지만, 손끝 너머로 전해지는 스필의 체온은 델 듯이 뜨거웠다.
그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어떻게든 평소의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붉게 달아오른 귓가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살짝 비틀었지만, 창살 너머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형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맹수처럼 뾰족하게 드러난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살짝 짓눌렀다.
Romeo
"You sprinted all the way back just to drop that on me?"
(고작 그 소리 하겠다고 여기까지 숨차게 뛰어왔냐?)
거칠게 내뱉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져 나왔다. 퉁명스러운 척 쏘아붙였지만, 창살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로미오는 헛숨을 들이켜며 창살 틈새로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Romeo
"I already warned you. If you dare forget even a second of tonight, I'm dragging you out of this place and making you pay for every single bit of it."
(내가 분명히 경고했잖아. 오늘 밤 단 일 초라도 까먹으면, 너 여기서 끌고 나와서 전부 다 청구할 거라고.)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 채, 지독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협박처럼 투덜거리는 말속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뻔뻔한 선언을 마친 로미오는 창살을 쥔 손을 천천히 거두며, 마지못해 턱 끝으로 기숙사 안쪽을 가리켰다.
Romeo
"Now turn around and go inside for real. Before I tear this fucking gate open and drag you out myself."
(이제 진짜 뒤돌아서 들어가. 내가 이 빌어먹을 문 뜯고 들어가서 널 끌고 나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