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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제와 부두제_잘 가(FIN.)

Spill Lute 2026. 10. 27. 02:44
광휘제와 부두제_잘 가
Romeo merrow X Spill Rute
벨하벤 중앙역에서 내려 순환선으로 갈아타고 루멘홀드가 자리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 내내 여름밤의 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오늘 밤의 루멘홀드는 평소와 달랐다.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마다 광휘제 무도회를 밝히는 화려한 금빛 조명이 새어 나왔고 멀리서 현악기 합주 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흘러내렸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외부 귀빈들과 동문들이 정문 근처를 오가고 있었다.
무도회장 안에 있었으면 지금쯤 저 답답한 음악에 맞춰 서 있었겠지. 내 옆에서 생선 샌드위치나 먹고 낮잠이나 자는 대신에.
스필의 목덜미에서 가로등 불빛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용혈석 목걸이를 힐끔거릴 때마다 로미오의 입꼬리가 자꾸만 비죽 올라갔다. 마침내 거대한 철제 정문 앞의 가로수 그늘에 멈춰 서자 그는 한참 동안 잡고 있던 스필의 손을 못내 아쉽게 놓아주었다.
로미오는 스필의 코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더니 턱 끝까지 채워두었던 벌워크 재킷의 지퍼를 천천히 끌어 내렸다.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밤공기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Romeo
"Give me the jacket back before you go in. If you walk past the main hall wearing Saltford colors tonight, your house warden is going to have a stroke."
(들어가기 전에 재킷은 벗어서 줘. 오늘 같은 밤에 솔트포드 옷을 걸치고 본관 앞을 지나갔다간 너희 기숙사 사감이 뒷목 잡고 쓰러질걸.)
그는 접혀 있던 소매를 풀어 스필의 어깨에서 재킷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하루 종일 스필을 감싸고 있던 옷감에서 그녀의 체온과 달콤한 와플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났다.
Spill
"로미오, ..."
정적.
Spill
"...으응, 잘 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미오의 어깨가 움찔했다. 오늘 밤의 마지막으로 무슨 대단한 말이라도 더 해줄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는데, 돌아온 것은 맥 빠질 정도로 싱거운 작별 인사였다.
하지만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재킷이 벗겨진 맨팔뚝을 어색하게 쓸어내리던 스필의 작은 손길이 그의 시선에 고스란히 잡혔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몸짓 하나가 이상할 정도로 가슴을 간질였다. 매번 뒤도 안 돌아보고 휙 가버리는 야속한 뒷모습이었지만, 오늘 밤에는 달랐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내내, 스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쇄골 아래에 자리 잡은 붉은 펜던트를 자꾸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로미오는 팔에 걸친 벌워크 재킷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아직 식지 않은 옷감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데우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원한다는 감정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우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스무 살의 로미오 머로는 오늘 처음 알았다. 무서울 게 없던 녀석이 고작 여자애 하나가 발목을 삐끗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남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싫어서 속을 끓이다가도, 내년 축제에 오라는 말 한마디에 일 년 치 계절을 통째로 저당 잡힌 기분이었다.
스필의 진녹색 드레스 자락이 코르델리스 기숙사 쪽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로미오는 정문 쇠창살 앞을 한 발짝도 떠나지 못했다.
인기척이 아예 끊기고 나서야 그는 얼굴에 몰렸던 열기를 식히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팔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들어 올려, 스필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이 닿았던 깃 부분에 코끝을 아주 잠깐 묻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귀뿌리가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Romeo
"...Fucking crazy. Seriously."
(...씨발, 미쳤나. 진짜.)
낮게 뱉어낸 욕설 끝에는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는 재킷을 어깨에 아무렇게나 둘러메고 언덕 아래의 전차역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당장 다음 주 시험이 끝나자마자 떠나기로 한 틸베이 주말 여행과, 올가을 전국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콩코던스, 그리고 기어코 스필의 안내를 받으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내년의 루멘홀드까지. 머릿속이 온통 스필과 함께할 시간들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솔트포드로 돌아가는 밤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