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외로운 조개껍데기

Spill Lute 2026. 10. 27. 02:46
외로운 조개껍데기
Romeo merrow X Spill Rute
밀려오던 잔잔한 바닷물 한 줌이 허공으로 둥글게 떠올라 조개껍데기 표면을 깨끗하게 헹궈냈다. 이어서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기까지 꼼꼼하게 닦아낸 로미오는, 한결 선명해진 푸른빛 조개를 다시 스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Romeo
"Put them side by side on your desk, then. If the old one gets lonely by itself, that's on you."
(그럼 책상 위에 두 개 나란히 올려 놔. 전에 준 거 혼자 둬서 외로워지면 네 책임이니까.)
Spill
"조개껍데기는 안 외로워해, 로미오."
로미오 치고는 꽤 귀여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Spill
"진주도 조갯살도 다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건데, ...외로울 리가 없잖아."
로미오는 처음에는 웃으려 했다. 그런데 웃음은 입꼬리까지 올라오다 말고 멎었다.
파도는 발끝까지 오지 않는 거리에서 낮게 부서졌다. 호박색 빛 구체 두 개가 젖은 모래 위에 조용히 떠 있었고, 그 빛에 스필의 손바닥 위 푸른 조개껍데기가 잠깐씩 새벽빛처럼 차갑게 번들거렸다. 식당가의 음악은 멀리서 둔하게 흔들렸고, 가까운 곳에서는 모래가 말라 가는 냄새와 바닷물의 짠 기운이 섞여 올라왔다.
스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로미오는 머릿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얇게 긁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실제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스필이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놓는 말들이 그랬다. 너무 오래 닳은 문지방처럼 매끄럽고, 그래서 더 이상한 말들. 죽은 적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하던 밤. 멈춘 시계라고 했던 개시제. 남겨진 쪽을 좋아한다고 했던 전차 안.
로미오는 손수건을 접던 손을 멈췄다. 엄지손가락 끝에 남은 바닷물기가 천에 스며들어 어둡게 번졌다. 그는 그 얼룩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툭 하고 혀를 찼다.
Romeo
"That’s a depressing way to talk about a shell."
(조개껍데기 하나 두고 되게 우울하게 말하네.)
말은 가볍게 나갔지만, 목소리 끝은 평소보다 낮았다. 그는 스필의 손바닥 위 조개껍데기를 빼앗지는 않았다. 대신 그 옆 모래 위에 쭈그려 앉아 작은 흰 조개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부서진 가장자리가 손톱 밑을 까끌하게 스쳤다.
Romeo
"And wrong. Leaving doesn’t make what’s left meaningless."
(그리고 틀렸어. 떠났다고 해서 남은 게 의미 없어지는 건 아니야.)
그는 흰 조개 조각을 빛 구체 아래로 들어 올렸다. 별것 아닌 파편이었다. 반쪽만 남아 있었고, 바깥쪽 무늬도 거의 닳아 있었다. 하지만 안쪽에는 희미한 분홍빛이 남아 있었다. 잘 보면 보이는 정도였다.
로미오는 그런 걸 찾아내는 데 이상하게 집요했다. 경기장에서 틈을 보는 것도, 비행 중 바람의 얇은 층을 밟는 것도, 스필이 삼 초 동안 바라본 목걸이를 다시 사러 돌아가는 것도 비슷했다. 남들이 지나치는 짧은 흔적을 붙잡고, 그것을 자기 뜻대로 중요하게 만들어 버리는 버릇.
Romeo
"This one’s broken, but it still catches light. So it’s not nothing."
(이건 깨졌지만 그래도 빛은 받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그는 조개 조각을 휙 던지지 않고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평소 같으면 보기 흉하다고 버렸을 물건을 이번에는 모래 위 작은 물웅덩이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말해 놓고 보니 지나치게 진지했다. 로미오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곧장 얼굴을 구겼다.
아무것도 안 남았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그대로 삼켜졌다. 그런 말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스필은 노골적인 말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날 때가 있었고, 로미오는 그 한 걸음을 아직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을 골랐다. 덜 정직하고, 더 자기다운 말.
Romeo
"Put the blue one next to the old one anyway."
(그래도 그 푸른 거, 전에 준 거 옆에 놔.)
"Not because shells get lonely. Because I said so."
(조개가 외로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랬으니까.)
호박색 빛 구체가 모래 위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 빛 아래 푸른 조개껍데기와 깨진 흰 조각이 각자 다른 색으로 반짝였다. 하나는 온전했고, 하나는 부서졌지만, 둘 다 빛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