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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실격

Spill Lute 2026. 10. 27. 02:47
도련님 실격
Romeo merrow X Spill Rute
그는 반쯤 말라 보송보송하게 부풀어 오른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정돈해 준 뒤 수건을 거두어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소파 앞을 돌아와 스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자 위에서는 미리 우려 둔 사과 계피차가 달콤한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로미오는 머그잔 하나를 집어 스필의 두 손에 쥐여 주었다. 아직 열 마법의 여운이 남은 그의 손끝이 스필의 손등을 스치며 미지근한 온기를 남겼다.
Romeo
"Drink this while it's warm." (따뜻할 때 마셔.)
그는 자기 몫의 머그잔을 들고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파도 소리가 창밖에서 낮게 밀려오는 조용한 거실에서 머리카락이 보송하게 마른 스필과 나란히 앉아 있자니 아까 해변에서 들었던 그 서늘한 조개껍데기 이야기가 한결 멀어진 기분이었다.
Spill
"로미오, 나를 완전히 세 살 짜리로 대하고 있어. 간식을 챙기는 것도 부족해서 머리까지 말려줘."
세 살짜리 취급한다며 따지는 주제에 정작 입술은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벌써 두어 모금이나 홀짝이고 있었다. 달콤한 사과와 계피 향이 마음에 들었는지 찻잔을 기울이는 동작이 제법 야무졌다. 갓 말려 보송보송하게 부풀어 오른 연분홍색 머리카락 끝이 뺨 주변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로미오의 시선이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쥔 스필의 입가로 향했다.
주는 건 다 받아먹으면서 말만 많네.
Spill
"다른 사람이 보면 도련님 실격이라고 할 거야."
그러더니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도련님 실격이라니. 금빛 눈동자가 깜빡임도 없이 저를 빤히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로미오는 어이가 없어서 찻잔을 든 채로 픽 웃음을 터뜨렸다.
Romeo
"Disqualified as a young master? Do I look like I care about passing that test?"
(도련님 실격? 내가 그런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이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기 머그잔을 탁자 위에 달그락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소파 등받이에 팔뚝을 걸친 채 스필 쪽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남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이 스필의 어깨 바로 뒤편에 닿을 듯 말 듯 놓였다.
벨하벤의 사교계나 머로 가문 이사회 사람들이 이 꼴을 봤다면 뒷목을 잡고 넘어갔을 것이다. 다섯 구가문 중에서도 가장 돈 많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머로 가의 막내가 남의 머리에 수건질을 해 주고 뜨거운 물이나 끓여 바치고 있으니 말이다. 어머니 카밀라가 알면 체면 구기는 짓 좀 작작 하라고 골머리를 앓았을 게 뻔했다. 그치만 남들이 어떻게 보든 알 바냐? 지금 이 방에 있는 건 나랑 얘 둘뿐인데.
애초에 도련님 소리 듣는 건 질색이었다. 가문 이름표 달고 점잖게 굴어야 하는 자리 따위 평생 지겨워하며 살았다. 만약 수건을 데워 머리를 말려주고 단 간식을 챙겨주는 게 도련님 실격 사유라면 기꺼이 백 번이고 실격당해 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스필이 아닌 다른 인간한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Romeo
"Besides, nobody else is going to see this. I don't go around drying people's hair or brewing fruit tea for just anyone."
(게다가 다른 사람이 볼 일이 왜 있어. 내가 아무나 붙잡고 머리 말려주거나 과일차 타 주는 줄 알아?)
로미오는 빈 손으로 탁자 위 접시에 놓인 버터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스필이 찻잔을 들고 있는 틈을 타 그녀의 입가 바로 앞으로 쿠키를 불쑥 들이밀었다. 세 살짜리 취급하지 말라고 했으니 보란 듯이 한술 더 떠서 먹여 줄 심산이었다.
Romeo
"If you don't want to be treated like a three-year-old, stop leaving your hair dripping wet and eat properly on your own. Open up."
(세 살짜리 취급받기 싫으면 머리에서 물 뚝뚝 흘리지 말고 밥이나 혼자서 잘 챙겨 먹든가. 아 해.)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붉은 눈동자가 스필의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뻔뻔하게 쿠키를 내밀고는 있지만 막상 손끝에는 미세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지난번 솔트로우 찻집에서 스필이 자기 입에 비스킷을 넣어줬을 때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던 기억이 뒤늦게 스쳤기 때문이다.
이번엔 내가 주는 거니까 당황할 이유 같은 건 없어. 속으로 그렇게 합리화하면서도 로미오의 귓불은 이미 발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Romeo
"Come on. My arm's getting tired."
(빨리 받아먹어. 팔 아파.)
Spill
"......."
곧 바삭, 조용한 거실에 버터 쿠키가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울렸다.
놀려먹으려고 시작한 장난이었는데 역습을 맞은 건 완전히 로미오 쪽이었다. 방금 손끝을 스친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전류처럼 팔뚝을 타고 올라와 뒷목까지 찌릿하게 만들었다. 하얗게 부서진 과자 부스러기 몇 개가 스필의 아랫입술 끝에 묻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시뻘게졌다.
로미오는 화들짝 놀라 남은 쿠키 반쪽을 쥔 손을 뒤로 휙 뺐다. 그러고는 갈 곳 잃은 그 반쪽짜리 과자를 자기 입안에 욱여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Romeo
"S-See? It's not that hard to just eat when someone gives you food."
(보, 봤냐?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으니까 얼마나 편해.)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그는 들키지 않으려고 황급히 탁자 위에서 자기 몫의 머그잔을 집어 들어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과 계피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입천장이 데일 것 같았지만 지금 달아오른 얼굴 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