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밤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그냥 들고 있다는 말이 녹슨 철제 계단을 오르는 로미오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랍에 넣는 것보다 더 지독한 대답이었다. 버리지도 못하고 잊지도 못한 채, 그저 무겁게 들고 있다는 말.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스필의 발소리가 쿵, 쿵, 하고 제 심장 소리처럼 울렸다.
로미오는 대답 없이 마지막 계단을 밟고 평평한 지붕 위로 올라섰다. 낡은 콘크리트 바닥과 녹슨 안전 난간으로 둘러싸인, 버려진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하프타이드의 그 어떤 술집 창가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운하의 푸른 가스등 불빛이 발아래로 길게 이어졌고, 그 끝에는 솔트로우 항구의 거대한 크레인들이 뿜어내는 주황색 조명이 밤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반대편으로는 벨하벤의 고풍스러운 첨탑들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떠 있었다. 루멘홀드와 솔트포드, 두 세계의 불빛이 차가운 바다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뒤섞이는 곳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로미오의 머리칼을 거칠게 흩트렸다. 그는 뒤따라 올라온 스필이 제 옆에 서는 것을 느끼며, 난간에 팔꿈치를 기댔다. 그녀의 어깨가 그의 팔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였다.
Romeo
"Heavy? You don't look like you could lift a damn thing."
(무겁다고? 너 뭐 하나 제대로 들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무겁다고? 너 뭐 하나 제대로 들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그는 야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녀의 작은 체구를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 작은 어깨 위에 대체 무엇을 그렇게 무겁게 이고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의 표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난간을 짚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는 스필이 들고 있다는 그 ‘기록’들이 부러웠다. 자신은 2년 전의 그날을, 그 빌어먹을 ‘바이트’ 사건을 아직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잊으려 발버둥 치거나, 혹은 술에 취해 뭉개버리거나. 그저 들고 있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Romeo
"...So, is this worth writing down? Or is it just another view you'll forget by morning?"
(…그래서, 이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나? 아니면 이것도 아침 되면 까먹을 그냥 풍경 중 하나야?)
(…그래서, 이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나? 아니면 이것도 아침 되면 까먹을 그냥 풍경 중 하나야?)
Spill
"이건 안 까먹어."
대답은 짧았다.
로미오는 난간을 짚은 채 숨을 멈췄다. 안 까먹는다는 말이 바람에 실려 귓가를 스쳤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렸다가는 얼굴에 무엇이 떠올라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발아래 운하에서는 작은 화물 거룻배 한 척이 푸른 가로등 불빛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뱃머리에 새겨진 낡은 부력 각인이 물결 위로 희미한 은빛을 흘렸다. 물살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로미오는 그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쫓았다. 무언가를 보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피지 더미니 무겁게 들고 있다느니 하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 애가 이건 안 까먹는다고 했다. 씨발, 이거 이긴 거 맞지.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초봄의 바닷바람이 그렇게 차가운데도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는 괜히 어깨를 한 번 털고 난간에 체중을 더 실었다. 녹슨 쇠가 끼익 하고 짧게 울었다.
Romeo
"...Obviously. I picked it. Nobody forgets a view I pick."
(…당연하지. 내가 고른 데잖아. 내가 고른 풍경 까먹는 놈은 없어.)
(…당연하지. 내가 고른 데잖아. 내가 고른 풍경 까먹는 놈은 없어.)
허세가 제 발로 걸어 나왔다. 말투는 평소처럼 오만했지만 마지막 음절이 바람 속에서 조금 갈라졌다. 그는 그걸 헛기침으로 덮었다.
그제야 시야 끝에 스필의 손이 들어왔다. 난간 위에 아무렇지 않게 얹힌 작고 하얀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차가운 쇠에 닿은 채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저 녹슨 난간은 낮 동안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먹은 고철이었다. 맨손으로 오래 쥐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로미오는 혀를 찼다. 그리고 제 재킷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린 뒤 그 소매 끝을 스필의 손과 난간 사이로 밀어 넣었다. 두꺼운 방염 외피가 쇠의 냉기를 막아섰다. 그의 손은 소매 안에 감춰져 있었다. 닿은 것은 옷감뿐이라고 우길 수 있는 거리였다.
Romeo
"Your hand's turning red. Use the sleeve. It's fireproof, it can handle a little cold."
(손 빨개지고 있잖아. 소매나 깔고 짚어. 방염인데 그깟 냉기쯤은 버티겠지.)
(손 빨개지고 있잖아. 소매나 깔고 짚어. 방염인데 그깟 냉기쯤은 버티겠지.)
그는 여전히 정면을 본 채였다. 크레인 하나가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며 주황색 경고등을 천천히 깜박였다. 그 리듬에 맞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소매 너머로 그녀의 손이 얹힌 무게가 미세하게 전해졌다. 아주 가볍고 아주 또렷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삼 년이나 이 섬에 있으면서 이런 데도 몰랐냐고. 대체 그동안 뭘 보고 살았냐고.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건 안 까먹는 거냐고.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정해져 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