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에 완전을 덧대어
Romeo Merrow X Spill Rute
Spill
"로미오, 뭔가 준비했지."
"불법은 준비한 거 있을 때만... 응, 보여줄 거 있을 때만 하잖아."
단맛에 혀끝이 절여진 채 덤덤하게 폐부를 찌르는 말에 로미오의 눈썹 한쪽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보여줄 게 있을 때만 불법을 저지른다는 그 묘하게 정확한 분석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귓바퀴를 찌릿하게 달궜다.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실제로 지난번 연구동 침투도 그랬고 케언웨더 야간 비행도 그랬으니까. 제 방식을 저렇게 태연하게 요약해 버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스필이 먼저 망설임 없이 암초 쪽 골목으로 발을 디뎠다. 부츠 굽이 울퉁불퉁한 박석 바닥을 단단하게 디디는 소리가 났다. 로미오는 두 걸음 만에 그녀의 옆자리를 따라붙었다. 짙은 회색 재킷 소매가 스필의 남색 코트 깃을 얕게 스쳤다.
Romeo
"Don't act like you've got me figured out."
(다 아는 척 굴지 마.)
입으로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걸음걸이에는 감출 수 없는 탄력이 붙어 있었다. 광장의 소음이 등 뒤로 멀어지고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눅진한 소금기가 계단참 사이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해안 하부 성벽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축제 기간 동안 굳게 닫혀 있는 것이 원칙이었다. 철제 난간에는 붉은색 경고 테이프가 휘감겨 있었고 낡은 룬 잠금장치가 굳게 물려 있었다. 하지만 로미오에게 그런 건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스필의 손에 들린 꿀차 컵이 흔들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그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받쳐 들고는, 반대쪽 손끝을 잠금장치 틈새에 밀어 넣었다.
작은 파열음과 함께 룬의 빛이 깜빡이며 풀렸다. 문이 삐걱거리며 안쪽으로 열렸다.
Romeo
"Watch your step. The stone gets slick from the spray."
(발밑 조심해. 파도 물보라 때문에 돌바닥 미끄러우니까.)
그는 열린 철문 틈을 몸으로 넓게 받쳐 선 채 스필을 먼저 아래쪽 계단으로 들여보냈다. 어둑한 해안선 저편에서 검푸른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잉크를 쏟은 듯 짙은 군청색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물기에 젖은 돌바닥 위에서 스필의 발끝이 찰나 흔들렸다. 그 미세한 기울어짐을 로미오는 놓치지 않았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뻗어 나갔다. 장갑을 끼지 않은 단단한 손가락이 스필의 코트 소매 너머 팔목을 단단히 쥐었다. 이어서 그녀가 스스로 균형을 잡자마자 쥐었던 힘을 툭 풀었다. 완전히 손을 떼는 대신 굳은살 박인 손바닥으로 팔꿈치 뒤쪽을 든든하게 받쳐 들었다.
스필은 언제나처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먼저 잉크빛으로 젖어 드는 5월의 하늘을 보았다. 이어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뭉개지는 아득한 수평선 너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하면서도 그저 지나간 세월의 한 자락을 가늠하는 듯한 그 기묘한 버릇이었다. 번지점프대 끝에서도, 케언웨더의 상공에서도 보았던 그 낯설고 서늘한 눈빛이었다.
로미오는 턱 끝을 굳히며 스필의 시선이 닿는 먼 바다를 함께 훑었다.
Romeo
"There’s nothing out there but black water."
(거긴 시커먼 바닷물 말고 아무것도 없어.)
Spill
"그러네."
낮게 깐 목소리에는 괜한 심술과 함께 미세한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스필이 저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볼 때마다 마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멀게 느껴지는 감각이 못마땅했다. 곁에 서 있으면서도 저 너머 어딘가로 발을 뺄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굴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로미오는 스필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아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갯바위 틈새로 부서진 파도가 튀어 오르며 하얀 물보라를 뿜어냈다.
Romeo
"Look up front. The reef flat is right ahead."
(앞이나 봐. 암초 평평한 자리는 바로 코앞이니까.)
시커먼 바닥물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로미오의 말대로.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바라본다.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고 느낀다. 다만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기분만을 느낄 뿐이었다. 영원히. 그래도 지금은 로미오에게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Spill
"벨하벤 시가지, 여기서 예쁘게 보여."
순순히 수긍하는 목소리에 로미오의 굳었던 턱 끝이 미세하게 풀렸다.
저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날아가 버릴 것 같던 시선이 마침내 등 뒤의 불빛으로 돌아왔다. 벨하벤 언덕을 타고 층층이 솟아오른 옛 석조 건물들의 창마다 노란 램프 불빛이 가득 차 있었다. 왕궁 첨탑 아래로 흐르는 빛의 궤적은 밤바다 위로 길고 엷은 황금빛 기둥을 드리우고 있었다.
로미오는 암초 꼭대기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 위로 성큼 올라섰다. 갯바람이 거세게 들이치는 길목이었으나, 그가 서자마자 등 뒤로 부는 차가운 바람줄기가 묵직하게 끊겼다.
Romeo
"Obviously. I didn't drag you all the way past three trespass warnings to show you a mediocre puddle."
(당연하지. 고작 어중간한 웅덩이나 보여주려고 무단침입 경고판을 세 개나 씹고 데려온 줄 알아?)
그는 바위 한쪽에 자리를 잡으며 허리춤의 가방을 열었다. 얇지만 방한 마법이 가볍게 결속된 암회색 담요를 꺼내 거칠게 털어냈다.
로미오는 턱짓으로 제 옆자리의 평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여전히 스필이 감기에 걸리거나 찬 바위에 주저앉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담요를 넓게 펼쳐 바위 위에 반쯤 깔고, 남은 절반은 스필이 앉았을 때 무릎 위로 덮을 수 있도록 손으로 툭툭 털어 모양을 잡았다.
Romeo
"Sit before your boots freeze to the rock. The first figure goes up in five minutes."
(부츠가 바위에 얼어붙기 전에 앉아. 첫 번째 형形은 5분 뒤에 올라가니까.)
그는 스필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시선을 내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등 뒤로 펼쳐진 벨하벤의 야경보다, 제 옆자리로 다가오는 스필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훨씬 더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곧 스필이 느린 발걸음으로 로미오의 곁에 다가와 섰다. 담요 위에 앉았다. 무릎 위로 덮진 않았다. 빈 무릎 위에 다소곳이 손을 올릴 뿐이었다. 벨하벤의 야경은 오늘따라 유독 낭만적이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파도 너머로 얇게 부서져 들렸다. 인파와 그리 멀어졌는데도 정적이 오진 않았다. 파도와 작은 속삭임과 바람소리와, 그리고 옆에 앉은 남자애의 심장 소리. 제 숨소리.
Spill
"로미오랑 있으면 맨날 불법이야."
고저 없는 목소리가 곧장 뒤를 이었다.
Spill
"근데 재미있어서 괜찮아."
로미오의 시선이 그 빈 무릎에 꽂혔다. 담요를 깔아둔 것도 바람을 막아선 것도 다 의미가 있어서였는데, 정작 그 당사자는 손끝 하나 따뜻하게 챙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 년쯤 살아온 사람처럼 세상의 온기에 무던한 태도가 매번 못마땅했다. 그래도 묻지 않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옆으로 팔을 뻗어 담요 자락을 끌어다 스필의 무릎 위로 툭 덮어 내렸다. 손끝이 그녀의 손등을 스칠 듯 말 듯 지나갔다.
Romeo
"You sat there like a rented statue. Were you planning to freeze quietly until dawn?"
(빌려온 조각상처럼 앉아 있냐. 새벽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얼어붙을 셈이야?)
그리고 뒤따른 두 번째 문장이 그의 흉곽을 정통으로 때렸다.
불법 운운은 늘 그래왔으니 흘려 넘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재미있어서 괜찮다는, 고저도 없고 강조도 없는 그 한 줄이 파도 소리보다 선명하게 남았다. 로미오는 입을 열려다 말고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수면에 도시의 불빛이 길게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Romeo
"Don't say it like that. It sounds like you're filing a complaint against me."
(시끄러. 나한테 민원 넣는 것 같거든.)
투덜거리면서도 어깨는 스필 쪽으로 몇 센티미터 기울어 있었다. 그는 담요 위에 손을 얹고 바위에 체중을 실었다. 옷깃 사이로 스필의 숨소리와, 저 아래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번갈아 들려왔다. 인파는 멀어졌는데도 정적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소란스러운 침묵이 낯설게 편안했다.
그때 항구 쪽에서 낮고 묵직한 발사음이 배를 타고 넘어왔다.
첫 번째 빛의 형이 검은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 붉은 금빛이 수면을 타고 사방으로 번지며 밤하늘을 반쯤 물들였다. 로미오는 허리를 곧게 펴고 스필의 옆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빛이 아니라 옆자리의 반응을 먼저 보려는 얼굴이었다.
Romeo
"There. First one's up. Don't blink."
(저기. 첫 번째 올라갔어. 눈 깜빡이지 마.)
옅게 퍼지는 연기, 폭발하지 않고 머무르는 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스필의 눈과 하늘의 빛깔이 정확히 맞아들어 공명한다. 쉴 새 없이 반짝였다. 로미오가 한 말이 반영된 건지 눈꺼풀의 깜빡임조차 멎은 순간.
Spill
"여기... 잘 보여서 좋아. 주변에 빛도 없고."
수평선 위로 떠오른 붉은 금빛은 불꽃처럼 흩어지는 대신 거대한 원환의 윤곽을 그리며 하늘 한복판에 고요히 머물렀다. 수백 명의 광 시전자가 나눠 붙든 빛이었다. 그 테두리를 따라 가느다란 선들이 천천히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며 섬의 해안선을 닮은 문양을 하나씩 새겨 나갔다. 옅은 연기가 그 아래에 얇게 깔려 빛을 한 번 더 받아냈다. 멀리 항구 쪽에서 밀려온 함성은 파도에 깎여 이곳에 닿을 즈음엔 누군가의 한숨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로미오는 하늘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정해둔 자리에 가 있었다. 스필의 금안이 하늘의 빛을 받아 같은 빛깔로 차올라 있었다. 그런데 반사라기엔 지나치게 맑았다. 바깥의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같은 박자로 맞받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눈꺼풀은 깜빡임조차 잊은 채였다. 진짜로 안 깜빡이네. 말 한마디에 그걸 곧이곧대로 지키는 건 또 뭐냐. 로미오는 번지점프대 아래에서 찰나 스쳤던 푸른 잔상을 떠올리려다 말고 턱에 힘을 주었다. 저 정도 광량이면 누구 눈이든 저렇게 보인다. 그렇게 정리해 두었다.
Romeo
"Of course it's good. Every tourist in Belhaven is down there fighting over railings and someone's kid's balloon."
(당연히 좋지. 벨하벤 관광객이란 관광객은 죄다 저 아래서 난간 자리랑 남의 집 애 풍선 때문에 싸우고 있을걸.)
의기양양하게 받아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박자쯤 늦게 나왔다. 그 사이 담요 위에서 작은 움직임이 꼼지락거렸다. 로미오의 눈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Spill
"로미오, 추우면 말해. 같이 덮어."
로미오는 코웃음부터 쳤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준비해 둔 것처럼 들리는 코웃음이었다.
Romeo
"I'm a Bulwark field student. I've stood in Saltrow sleet for six hours in a wet harness. This is a spa."
(나 벌워크 현장 실습생이야. 젖은 하네스 차고 솔트로우 진눈깨비 속에 여섯 시간 서 있어본 사람이라고. 이 정도는 찜질방이지.)
말은 그렇게 해놓고 그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마침 등 뒤에서 한 번 크게 몰아쳐 담요 끝자락을 들썩였다. 로미오는 그 들뜬 모서리를 잽싸게 붙잡아 제 무릎 위로 끌어다 눌러 놓았다. 스필의 무릎에서 그의 무릎까지 암회색 천이 한 장으로 팽팽하게 이어졌다. 붙잡은 손은 그대로 천 위에 얹혀 있었다.
Romeo
"...It was flapping. If it flies into the sea, I'm not diving for it."
(...펄럭거려서 그래. 바다로 날아가면 난 그거 건지러 안 들어갈 거거든.)
하늘에서는 원환이 마지막 선을 닫으며 서서히 빛을 거두고 있었다. 꺼져가는 금빛이 그의 붉어진 귓바퀴 위를 한 번 쓸고 지나갔다. 다음 형이 오르기까지의 짧은 어둠 속에서 로미오는 담요 아래 무릎을 빼지도, 더 가까이 붙이지도 않은 채 수평선 쪽을 노려보듯 앉아 있었다.
두 번째 형은 푸른빛이었다.
바다 위로 솟은 빛줄기가 거대한 나선을 그리며 천천히 감겨 올라갔다. 세 번째는 흰빛이었다. 아홉 개의 점이 원을 이루어 서로를 향해 가느다란 선을 뻗었다. 항구 쪽 함성은 그때마다 조금씩 커졌다가 파도에 깎여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옆자리에서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로미오는 세 번째 형이 꺼질 무렵에야 눈치챘다. 저 눈꺼풀이 빛이 떠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 형을 기다리는 어둠 속에서만 짧게 깜빡였다가, 하늘이 다시 밝아지면 또 꼼짝 않고 열려 있었다. 진짜로 지키고 있잖아. 그냥 해본 소리를 무슨 계약 조항처럼.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그는 어금니로 꾹 눌렀다.
그리고 담요가 느슨해졌다.
팽팽하던 암회색 천이 두 무릎 사이에서 맥없이 늘어졌다. 대신 옆구리에 코트 소매가 닿았다. 남색 울이 그의 재킷 팔꿈치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로미오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천 위에 얹어두었던 손이 갈 곳을 잃고 손가락 마디만 한 번 오므라들었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바닷바람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소금기 섞인 냉기 대신 식은 꿀차의 달큰한 냄새와 갓 산 코트의 양모 냄새가 코끝에 얹혔다. 스필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또렷하게. 그는 그게 제 귀에 대고 쉬는 숨처럼 크게 들린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소리 위로 제 심장이 쿵쿵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Romeo
"...You're allowed to blink, you know. I didn't mean it legally."
(...눈 깜빡여도 돼. 법적 효력 있는 말 아니었다고.)
목소리는 낮았고 생각보다 쉬어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척 정면을 노려보았다. 실제로 보고 있는 건 시야 가장자리에 걸린 연분홍 머리카락 끝이었다. 바람에 한 가닥이 날려 제 재킷 어깨에 걸렸다가 떨어졌다.
로미오는 조금 망설였다. 그러다 늘어진 담요 자락을 집어 스필 쪽으로 한 번 더 끌어올렸다. 이번엔 둘의 무릎을 한꺼번에 덮을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몸을 빼지는 않았다. 팔꿈치 하나를 그대로 맞댄 채였다.
Romeo
"And don't get any ideas. I'm only staying put because you're blocking the wind on this side."
(그리고 착각하지 마. 이쪽 바람을 네가 막고 있어서 가만있는 거야.)
바람은 정확히 그의 등 뒤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항구 쪽에서 또 한 번 둔중한 발사음이 물을 건너왔다. 네 번째 형이 수평선 위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짙은 초록빛이 섬의 윤곽을 따라 번져나가며 두 사람의 얼굴과 맞닿은 소매 위에 같은 빛깔을 칠했다. 로미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오르는 동안 한 번쯤은 옆자리 눈꺼풀이 깜빡이는지 확인하려는 듯 눈동자만 아주 조금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Spill
"응. 지금까지 몇 개 올라갔더라."
코트 소맷단을 칠해 올리는 빛깔이 힘을 잃을 무렵 입이 열렸다. 번져나간 빛 끄트머리가 두사람의 얼굴을 부드럽게 훑고 사라졌다. 다시 벨하벤의 야경만이 광원의 전부인 순간이 왔다. 그때쯤 스필이 로미오를 바라봤다. 빛이 모두 떠났는데도 여즉 그 눈 너머가 반짝였다. 여전히 금빛이었다. 일렁이는 녀석이었다.
Spill
"뭔가 로미오라면 더 떠들썩한 방식으로 구경하자고 할 줄 알았어. 얌전히 앉아서 보는 거 말고. 근데... 의외네."
초록빛이 마지막 한 줄기까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늘이 비자 바다는 금세 제 색을 되찾았다. 먹물을 엎은 듯 검은 물결 위로 벨하벤의 창문 불빛만이 잘게 부서져 떠 있었다. 로미오는 손가락 하나를 접으려다 말고 대답부터 했다.
Romeo
"Four. Five to go. The last one's the broken one, so technically four and a half."
(네 개. 다섯 개 남았어. 마지막 건 일부러 덜 그린 거니까 엄밀히 따지면 네 개 반이고.)
그러고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멈췄다.
빛은 다 떠났는데 스필의 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도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금색이 물처럼 고여 안쪽에서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로미오의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아까 그건 광량 탓이라고 정리해 뒀잖아. 지금은 하늘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그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그녀의 눈에서 콧등으로, 다시 코트 깃으로 억지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의외라는 말이 귀에 걸렸다.
Romeo
"Louder how? Like what, strapping you to my back and flying through the fourth figure?"
(떠들썩하게 뭐. 너 등에 묶고 네 번째 형 한가운데를 뚫고 날아가기라도 할 줄 알았냐?)
비웃듯 말했지만 대답이 너무 빨랐다. 실제로 그 계획은 사흘 전 기숙사 침대 위에서 반쯤 짜여 있었다. 항구 쪽 관람선 지붕 위에서 결계 발판을 깔고, 형이 오를 때마다 가장 가까운 각도로 옮겨 다니는 계획이었다. 이루카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로소는 금제 국소 해제 구역의 감시선 배치도까지 찾아왔다. 그걸 접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하프타이드 골목의 막다른 벽이 떠올랐다. 제 고함 한 번에 귀를 막고 웅크리던 작은 어깨가.
로미오는 담요 위에 얹은 손을 주먹으로 말아 쥐었다가 폈다.
Romeo
"...The airspace is locked tonight. Coast Guard's got four boats out and a Grade 1 qualification doesn't mean shit when the Interdiction's half-lifted. I'm not losing my license over fireworks."
(...오늘 밤은 공역 통제야. 해안경비대 배가 네 척이나 떠 있고, 금제가 반쯤 풀려 있을 땐 1급 비행 자격도 좆도 소용없어. 불꽃놀이 때문에 면허 날릴 생각 없거든.)
그럴듯한 핑계였다. 절반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는 그 사실에 기대듯 턱을 들었다.
Romeo
"Don't look at me like that. It's not consideration. I just didn't want to carry you out of a crowd. Again."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배려 같은 거 아니니까. 인파 속에서 또 너 들쳐 업고 나오기 싫었던 것뿐이야.)
한 번도 업어본 적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때 항구 쪽에서 낮은 발사음이 물을 타고 건너왔다. 이번엔 소리가 길었다. 수평선 아래에서 아직 색을 정하지 못한 희뿌연 빛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로미오는 팔꿈치를 빼지 않은 채, 그 빛보다 먼저 옆자리 눈동자가 어떤 색으로 물드는지 곁눈질로 기다렸다.
Spill
"비슷한 걸 하지 않을까 했어. ...근데 로미오, 나 들쳐 업고 나온 적은 아직 없잖아. 그건 잘못된 정보야."
스필이 언제나처럼 반박했다. 눈동자 너머의 빛은 그녀가 눈꺼풀을 한 번 내리고 밀어올리는 사이에 녹아 사라졌다. 방금까지의 빛은 없던 녀석이었던 것처럼. 다만 곧 다섯 번째 형이 빛을 또 한번 채워넣었고, 로미오는 또다시 일렁이는 금빛을 볼 수 있게 됐다.
Romeo
"Wrong information? I've pinned you against a maintenance shaft wall and strapped a full-body harness on you twice. Splitting hairs over whether my hands were under your knees."
(잘못된 정보라고? 유지보수 통로 벽에 너 붙들고 있었던 것도, 전신 하네스 두 번 채워준 것도 나야. 내 손이 네 무릎 아래로 들어간 적 있는지 어쨌는지로 따지냐?)
말을 뱉고 나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등대 계단에서 굴렀던 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정말로 업어서라도 병원까지 갈 참이었다. 목뼈가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못 했을 뿐이다. 이걸 설명하면 지난번과 똑같은 소리를 또 듣는다. 로미오는 설명을 접었다. 그랬더니 스필의 질문이 이어졌다.
Spill
"왜 네 개 반만 해?"
다섯 번째 형은 옅은 자줏빛이었다.
수면 바로 위에서 시작한 빛이 위로 갈수록 엷어지며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아래는 진하고 위는 흐릿한, 마치 물감을 위쪽으로 번지게 풀어놓은 것 같은 형이었다. 항구 쪽 함성이 이번엔 좀 더 길게 끌렸다.
스필의 눈에서 일렁이던 금빛은 자줏빛 형이 채워 넣은 빛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눈꺼풀을 한 번 내렸다 올리면 사라지고, 하늘이 밝아지면 다시 차오르고. 로미오는 이제 그 리듬을 예상할 수 있게 됐다.
Romeo
"Nine figures. One per member of the First Nine. That's the whole point of tonight."
(아홉 개. 최초의 아홉 명당 하나씩. 오늘 밤은 그걸 위해 존재하거든.)
그는 턱짓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Romeo
"The ninth never gets finished. Half the ring, no closing line. Nobody knows what happened to the Ninth, so the design leaves it open."
(아홉째는 끝까지 안 그려. 원의 반만 그리고 닫는 선을 안 그어. 아홉째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설계 자체를 열어두는 거야.)
광 시전자 수백 명이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쪽을 남긴다. 그리고 나라 전체가 그것을 완성되지 않은 채로 받아들인다. 로미오는 그게 영 마음에 걸렸다. 선이 끊긴 자리를 볼 때마다 손을 뻗어 이어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가버린 놈 하나 때문에 백 년 넘게 같은 자리를 비워둔다는 건, 로미오의 세계에선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Romeo
"If it were me I'd have filled it in and drawn the last one. Leaving a hole in the sky every year on purpose is just..."
(나 같으면 그냥 채워서 마지막까지 그렸겠다. 매년 하늘에 구멍을 비워두는 건 그냥...)
그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줏빛 형이 위쪽부터 흐릿하게 풀려 사라졌다. 수평선 아래에서 다음 색이 아직 올라오지 않은 어둠이 잠깐 길게 늘어졌다. 그 짧은 사이에 로미오는 담요 위에 얹어둔 손으로 스필 무릎 쪽 천을 한 번 정리했다. 자기 무릎에 걸쳐둔 자락을 조금 풀어 넘겨주는 솜씨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항구 쪽을 노려보았다.
아홉째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스필의 입이 한 번 열리려 들었다. 더는 열리지 않고 닫혀버렸고, 살짝 들린 어깨가 다시 낮아지고 말았다. 담요 아래에 둔 손이 얌전했다. 그래, 아무도 모를 수밖에.
그람메는 어딘가에서 잠들어버렸다. 그가 잠든 뒤 생겨난 찌꺼기로 제가 탄생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완성되지 못한 형의 탄생 비화와 같다. 모두가 미완성에 동의했고 미완성을 설계했다. 탄생하여 불완전한 것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 조각 하나가 빠진 것. 조각, 그 조각. 그것은 파란 형이 눈동자에 빛을 쏟아냄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쓸려 내려간 앞머리 덕에 그늘져 빛이 막혔다. 반짝이던 것이 잠시 꺼진다.
Spill
"......."
눈을 감진 않았다. 푸른 빛으로 물든 제 허벅지가 보였다. 시야 가장자리엔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도. 이젠 정말로 입이 열렸다.
Spill
"한낱 조각이어선 완전해질 수 없으니까."
"응, 확실하게 굳어진 게 아니면."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파도 소리에도 묻힐 지경이 되었다.
Spill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채워지지 못한 채로 남는 거지."
여섯 번째 형은 파랗게 떠올랐다.
수면을 수직으로 가르는 빛줄기 두 개가 나란히 솟아 서로 감기며 위로 올라갔다. 바닷물이 그 아래에서 잔뜩 부풀어 올라 파도가 유난히 크게 철썩였다. 항구 쪽 함성이 이번엔 유독 컸다. 로미오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스필의 정수리와, 빛을 등지고 그늘진 얼굴만 보였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파도 소리에 반쯤 먹혀 사라질 만큼. 로미오는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형 얘기로 받아들였다. 아홉째의 반쪽 원. 그는 방금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돌아온 문장은 너무 딱 맞아떨어졌다. 남의 하늘에 대해 말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검은 물처럼 시린 게 그 목소리에서 배어 나왔다.
로미오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Romeo
"What."
(뭐.)
짧게 나왔다. 그는 담요 위에 얹었던 손을 들어 스필의 턱 밑으로 넣었다. 손등으로 그녀의 이마를 받쳐 조금 올렸다. 그늘진 얼굴이 파란 빛 속으로 되돌아왔다. 눈은 감겨 있지 않았다. 뜨고 있었다. 로미오는 그 눈이 하늘을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뗐다. 뗀 손은 무릎 위로 내려와 담요를 움켜쥐었다.
Romeo
"Are you talking about the figure or about yourself."
(그거 형 얘기 하는 거야, 네 얘기 하는 거야.)
그것도 질문 같지 않게 나왔다.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얼굴을 돌려 하늘을 봤다. 파란 빛이 아직 한창이었다. 나란히 솟은 두 줄기가 서로를 조여 올라가며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 있었다. 합쳐지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걸 로미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점을 보지 않았다.
시야 끝에서 스필의 연분홍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어졌다. 로미오는 팔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한 번 밀어 넣었다. 결계로 감싼 손끝이 아니어서 차가웠다. 그는 손끝의 온도를 확인하듯 잠깐 멈춰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다시 수평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Romeo
"That's the sixth. Three left. The last one's the broken one, so pay attention to that one."
(여섯 번째야. 세 개 남았어. 마지막이 그 반쪽짜리니까, 그건 똑바로 봐.)
목소리는 평소처럼 퉁명스러웠다. 다만 그는 이제 하늘을 보면서도 어깨를 스필 쪽으로 완전히 붙여 두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실이, 로미오를 조금 전보다 훨씬 조용한 사람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자기 방식대로 해석을 붙여보려 했다. 조각. 그걸 반쪽짜리 형에 빗댄 거겠지. 그러니까 한낱 반쪽은 완성이 안 되니까, 채워지지 못한 채 남는다. 아홉째 이야기를 그렇게 정리한 거다. 그렇게 정리해도 저 기묘한 분위기는 설명이 안 됐다. 로미오는 그 어긋난 부분을 소매 안쪽에 밀어 넣었다.
딱 한 번, 스필이 방금 한 말이 오늘 밤의 하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생각을 오래 붙들진 않았다. 재킷의 옷감과 코트의 옷감이 스쳤다. 옷감 두 종류 만큼의 두께를 사이에 대고 두사람이 이어졌다. 달라진 건 없었으나 맞닿은 사실 자체가 변곡점이다. 로미오의 손길 덕에 들린 고개, 그 얼굴에 다시금 빛이 내려앉았다. 이어 로미오를 따라 스필의 시선이 다시 형을 향했다. 다만 눈에 아지랑이가 머물지 않았다.
형 이야기인지 아닌지 묻는 질문엔 답이 없었다. 로미오가 보지 않고 붙잡지 않은 만큼의 대답이었다.
Spill
"......."
로미오는 그 침묵을 억지로 열어젖히지 않았다. 묻고 나서 고개를 돌려버린 쪽은 자신이었다. 돌아오지 않은 대답의 무게는 정확히 그만큼이었다. 그는 그걸 알았다. 알아서 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일곱 번째 형은 주홍빛이었다. 바다 위에 낮게 깔린 빛이 파도의 결을 따라 일렁이며 수면 전체를 한 장의 비단처럼 물들였다. 항구 쪽에서 아이들의 환호가 가늘게 섞여 들었다. 로미오는 그 빛을 끝까지 보았다. 옆자리를 곁눈질하는 버릇은 이번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맞닿은 어깨에 실린 무게를 한 번도 덜어내지 않았다.
여덟 번째는 은빛이었다. 수많은 작은 점들이 하늘 높이 흩뿌려졌다가 천천히 내려앉으며 바다 위로 쏟아지는 별비처럼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바람이 한 차례 거세게 몰아쳤다. 로미오는 담요 끝을 손등으로 눌러 고정했다. 옷감 두 겹 너머의 체온이 바람 속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홉 번째.
발사음이 유난히 길었다. 수평선 위로 희게 바랜 금빛 선 하나가 솟아올라 크게 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원의 오른쪽 절반이 또렷하게 그어졌다. 선은 정점을 지나 왼쪽으로 내려오다가, 그대로 허공에서 끊겼다. 닫는 선은 없었다. 반쪽짜리 원이 검은 하늘에 걸린 채 조용히 떠 있었다. 항구 쪽 함성이 이번엔 오지 않았다. 매년 이 순간만큼은 만 명이 한꺼번에 숨을 죽인다는 걸 로미오는 알고 있었다. 파도 소리만 바위 아래에서 철썩였다.
로미오는 그 끊긴 자리를 오래 노려보았다.
조각이어선 완전해질 수 없다. 채워지지 못한 채로 남는다. 그 말이 저 끊긴 선 끝에 걸려 대롱거리는 것 같았다. 씨발, 듣기 싫다고. 그는 혀를 한 번 차고는 오른팔을 들었다. 시전은 아니었다. 손끝에 빛 한 점 맺히지 않았다. 그저 검지를 뻗어 하늘에 대고, 반쪽 원이 끊긴 자리에서부터 왼쪽 아래를 지나 처음 시작점까지 천천히 선을 그어 이었다. 어린애가 창문에 김 서린 데다 낙서하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Romeo
"There. Closed."
(됐다. 닫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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