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어깨에 닿은 무게는 가벼웠다.
로미오는 몸을 굳혔다. 숨을 들이쉬는 것도 멈춘 채, 어깨뼈를 단단히 세워 그 무게를 그대로 받쳐 들었다. 남색 코트의 후드 천이 뺨 옆을 살짝 스쳤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재킷 깃 위로 흘러내리는 감각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는 그 자리에 돌처럼 박힌 채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못했다.
Spill
"나중에라도 로미오가 후회 안 했으면 좋겠어. 애초부터 안 할 수 있으면... 그러면 좋잖아."
"화낼 줄 알았는데. 보통은 그러니까."
그 목소리는 바닷바람에 흩어지면서도 로미오의 귀 안쪽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화를 낼 줄 알았다는 뒤이은 말에, 로미오는 이를 악물었다. 보통은 그런다는 그 무덤덤한 체념이 기어코 신경을 긁었다. 보통이라니. 어떤 새끼들이 이 계집애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등을 돌렸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 빌어먹을 '보통'의 무리에 자신이 끼워 맞춰졌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Romeo
"...I told you. Don't put me in with everyone else."
(...말했잖아. 날 남들이랑 똑같이 묶지 말라고.)
(...말했잖아. 날 남들이랑 똑같이 묶지 말라고.)
그는 그렇게 내뱉고는 제 뺨을 스필의 후드 머리맡 쪽으로 아주 살짝 기울였다.
Spill
"나 유학생인 것도 알지."
스필은 하나씩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로미오가 지금 이 손을 놓고 어깨를 다시 높여야 할 이유.
Spill
"그리고 계속... 한결같을 거야. 난 멈춘 시계야."
그는 어깨에 기댄 머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깍지 낀 손을 풀지도 않았다. 대신 턱 끝에 힘을 주어 고개를 돌리고, 후드 아래 가려진 스필의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금빛 눈동자는 젖은 모래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로미오는 그 눈이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멈춘 시계. 그 비유가 로미오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렀다. 그는 그 말이 단순한 은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는 비웃음을 택했다. 그게 로미오가 도망치는 방법이었다.
Romeo
"So you're saying you're not going anywhere. Good. Saves me the trouble of chasing you down."
(그래서, 어디 안 가고 여기 계속 있겠다는 소리네. 잘됐네. 쫓아다닐 수고는 덜었군.)
(그래서, 어디 안 가고 여기 계속 있겠다는 소리네. 잘됐네. 쫓아다닐 수고는 덜었군.)
그조차 억지였다. 스필이 던진 말의 진짜 의미를 일부러 비틀어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유학생이라는 신분,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암시. 그 모든 것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로 포장해 버렸다.
Romeo
"And what's with the 'stopped clock' crap? You trying to be poetic? You're terrible at it. Don't do it again."
(그리고 '멈춘 시계'는 또 뭐야, 씨발. 시라도 읊는 거냐? 재능 존나 없으니까 다신 하지 마.)
(그리고 '멈춘 시계'는 또 뭐야, 씨발. 시라도 읊는 거냐? 재능 존나 없으니까 다신 하지 마.)
말마다 가시를 둘러 보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필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발밑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부러 날을 세운 셈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잡은 손에 힘을 꾹 주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Spill
"어차피 5분 안 셀 거잖아. 로미오는."
"난 원래 안 셌고."
"난 원래 안 셌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필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로미오가 그녀를 제자리에 붙들어 매기 위해 주문을 건 값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