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현상
Romeo Merrow X Spill Rute
Romeo Merrow X Spill Rute
스필의 말이 맞았다. 5분을 세든 10분을 세든 어차피 일어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손목에 감아 쥔 손가락 끝으로 잔잔한 온기가 전해졌다. 제자리에 박제하듯 눌러둔 손아귀의 힘을 스필은 털어내지 않았고, 로미오는 그 방치를 누렸다.
그때였다. 바다 저편, 칠흑 같던 수면 아래에서 은은한 금빛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불꽃놀이의 잔광이 물결에 굴절되어 비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빛은 사그라지지 않고 물길을 가르며 빠르게 다가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금빛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암초 바로 아래 수면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고기들은 암초 기둥을 둘러싸고 매끄러운 나선을 그리며 돌았다. 바닷속에 금빛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장관이었다. 인공적인 광 시전의 빛과는 달랐다. 지맥의 흐름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차가운 심해의 물결 속에서 오직 그 무리만이 찬란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로미오는 쥐고 있던 스필의 손목을 불식간에 제 쪽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기시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솔트로우 항구의 수몰 성문 아치 아래, 그 깊은 바닷속에서 마주쳤던 풍경과 똑같았다. 그때도 물고기 떼는 로미오의 결계를 무시하고 스필의 주위를 맴돌며 기이하게 일렁였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자연현상도 아니었다.
로미오의 붉은 눈동자가 좁혀지며 발밑의 금빛 나선과 스필의 옆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Romeo
"Hey. You seeing this?" (야. 이거 보여?)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감탄이 아니었다. 경계와 의문이 섞인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그는 주변의 마나 농도를 가늠했다. 금제 경보가 울릴 만한 조짐은 없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그의 신경을 거칠게 긁어댔다.
Spill
"응, 보여. 물고기떼. 엄청 반짝이네."
스필은 여전히 그 멍한 눈으로 금빛 소용돌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지도 않고, 신기해하지도 않는 그 무심한 얼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태도였다. 멈춘 시계라느니, 유학생이라느니 하던 알 수 없는 말들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엉켜 붙었다.
Romeo
"What the hell did you call down here? Did you cast something?"
(너 밑에 뭘 불러들인 거야? 뭐 시전이라도 했어?)
(너 밑에 뭘 불러들인 거야? 뭐 시전이라도 했어?)
그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스필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몸을 제 품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겨 바위 가장자리에서 멀어지게 했다. 스필은 저항 없이 끌려갔다. 어깨에 기댔던 머리가 로미오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Spill
"나 아무것도 안 불렀는데. 시전도 안 했어."
그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로미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수면 아래의 금빛 나선은 점점 더 촘촘해지고 있었다.
물고기 떼는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손짓을 따르는 것 같았다. 암초 기둥을 축으로 삼아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튕겨내는 금빛 파편들이 수면 위로 튀어 올라, 어두운 암초 상단을 은은하게 밝혔다. 그 기묘한 군무는 확실히 아름다운 축에 속했다. 동시에 상식적인 생태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로미오는 턱을 바짝 당겨 품 안의 스필을 내려다보았다.
Romeo
"You didn't cast anything, and they just decided to come give you a private show? Bullshit."
(시전도 안 했는데 이것들이 너한테 공연이라도 하러 기어 나왔다는 거냐? 지랄 마.)
(시전도 안 했는데 이것들이 너한테 공연이라도 하러 기어 나왔다는 거냐? 지랄 마.)
그는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성(聲) 계열의 기본 결계를 손끝에 얇게 띄웠다. 언제든 바다 쪽에서 이상 파동이 튀어 오르면 스필의 머리 위로 덮어씌울 준비였다. 하지만 물고기 떼에서는 살기도 비정상적인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깊은 심해의 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린 환희였고 그게 파도 소리에 섞여 일렁일 뿐이었다.
로미오는 이 여자애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엮여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속이 바짝 탔다.
물고기 떼는 수면 위를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바퀴 휘감더니, 거짓말처럼 꼬리를 돌려 깊은 바다 너머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금빛 잔상이 칠흑 같은 수면 아래로 서서히 침전해 갔다.
Romeo
"...Whatever. It's gone."
(...됐어. 사라졌잖아.)
(...됐어. 사라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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