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휘제와 부두제
Romeo merrow X Spill Rute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축제 한복판에서 항구에 뛰어들 생각 없다고 잘라 말했는데. ‘볼래’라는 짧은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귀에서 열이 확 올랐다. 이 녀석이 저런 식으로 원하는 걸 똑바로 말할 때마다 거절하는 법을 모르겠다. 애초에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Romeo
"...You're seriously annoying. Don't move a single step from this stair, got it?"
(...너 진짜 성가셔. 이 계단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알았냐?)
말과는 달리 입꼬리는 이미 건방지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로미오는 난간 위에 가볍게 손을 짚더니 계단조차 쓰지 않고 단숨에 아래쪽 출발 폰툰 위로 뛰어내렸다.
쿵, 하는 묵직한 착지음과 함께 출발 대기열에 서 있던 윈드워드 학생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올해 콩코던스 대표팀에 복귀한 로미오 머로가 장비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출발선 앞에 서자 주변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안전 요원이 호각을 입에 물고 다가오려다 로미오를 알아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비켜섰다.
로미오는 계단 위 난간에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스필과 눈을 맞췄다. 턱을 까딱 들어 보인 그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Romeo
"Serr. Vael."
(고정. 도약.)
출발 신호 따위는 기다리지도 않았다. 로미오의 군화가 부두 끝을 박차고 검은 해수면 위로 뻗어 나갔다.
발바닥이 차가운 물결에 닿기 직전, 손바닥만 한 붉은빛의 육각 결계 발판이 수면 바로 위에 면도날처럼 얇고 단단하게 맺혔다. 이루카가 찼던 조잡한 부목 장비처럼 스파크가 튀거나 박자가 밀리는 일은 없었다. 오직 목소리와 정밀한 계산만으로 찍어낸 발판이 로미오의 체중을 온전히 받아내며 마른 파열음을 냈다.
하나. 둘. 셋. 넷.
아까 이루카가 처박혔던 네 번째 지점을 로미오는 보란 듯이 가볍게 짓밟고 지나갔다. 발이 떨어지는 즉시 이전 발판은 깔끔하게 흩어지고, 다음 보폭이 닿는 자리에 오차 없이 새 발판이 깔렸다. 수면 위로 하얀 물보라가 부채꼴로 솟구쳤지만 정작 그의 바짓단은 물 한 방울 젖지 않았다.
첫 번째 주황색 부표 앞에서 로미오는 속도를 줄이는 대신 허공에 비스듬한 경사 결계를 세워 방향을 완전히 꺾었다. 가속도를 그대로 살려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선회한 그가 다섯 걸음 만에 다시 출발 폰툰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주변 구경꾼들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로미오는 쏟아지는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풍에 헝클어진 남색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계단를 두 칸씩 밟아 스필의 코앞으로 올라왔다.
Romeo
"...See? Four steps is for amateurs. You don't even get your shoes wet if you actually know how to cast."
(...봤냐? 네 발짝 만에 빠지는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야. 마법을 제대로 쓸 줄 알면 신발 밑창도 안 젖는다고.)
Spill
"로미오 친구 말대로네. 타이밍이 깔끔해."
"봐서... 좋았어. 방금 거 멋졌어."
로미오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을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열기가 턱선을 타고 순식간에 양 볼과 귀 끝까지 번졌다. 로미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 바다 쪽을 노려보며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Romeo
"...That wasn't even serious. Just a warm-up pace."
(...방금 건 진심으로 뛴 것도 아니야. 그냥 몸풀기 속도였다고.)
목소리가 영 볼품없이 갈라졌다. 아래쪽 폰툰에 모여 있던 윈드워드 학생들이 아직도 수군거리며 단말기 카메라를 들어 올리려 하자 로미오는 인상을 팍 구기며 스필의 손목을 다시 낚아챘다.
이 녀석이 남들 앞에서 또 무슨 엉뚱한 칭찬을 뱉어낼지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방금 그 말을 옆에 있는 구경꾼들이 같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괜히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나만 들으면 되는 걸 왜 이렇게 사방이 트인 데서 말하냐고.
Romeo
"Come on. Idiots are starting to stare, and I'm not giving Windward free lessons."
(가자. 머저리들이 또 구경하기 시작했어. 윈드워드 애들한테 공짜 시범 보여줄 생각 없으니까.)
로미오는 스필의 손을 이끌고 점검용 계단을 내려와 인파가 덜 붐비는 제4부두 연결 통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보폭이 빨라지려다 말고 스필이 걸친 커다란 벌워크 재킷 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속도를 늦췄다. 붉어진 귀는 해풍을 맞아도 도무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Romeo
"...Wait until autumn. If you thought five steps on flat water looked good,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가을까지 기다려 봐. 잔잔한 물 위에서 다섯 발짝 뛴 게 멋있어 보이냐? 넌 아직 제대로 된 거 보지도 못했어.)

'ARCHI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휘제와 부두제_목걸이를 걸어줘  (0) 2026.10.27
광휘제와 부두제_목걸이 샀어  (0) 2026.10.26
창살 하나 사이에 두고  (0) 2026.10.26
기현상  (0) 2026.10.26
벽  (0) 202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