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빛나던 당신에게
Romeo merrow X Spill Rute
물안경도 안 끼고 들어갔잖아, 저 바보가.
스필이 수면 아래로 사라진 순간 로미오는 심장이 철렁해서 곧장 숨을 들이켜고 따라 잠수했다. 눈이 쓰라릴 테니 당장 끌어올려서 목에 걸린 물안경부터 씌워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물속에서 마주한 광경이 그의 모든 계획을 한꺼번에 지워버렸다.
스필은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다. 소금물 속에서 찡그리지도 깜빡이지도 않고. 햇빛이 수면을 뚫고 내려와 일렁이는 빛기둥 사이에서 그 금빛 눈동자가 바닷물보다 투명하게 반짝였다. 연남색 래시가드 자락과 분홍빛 머리카락이 물결 따라 하늘거리는데 움직임에는 물의 저항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기는 평생 바다 옆에서 자랐고 스킴이며 잠수며 안 해본 게 없는데도 저렇게 헤엄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건 수영이 아니라 그냥 물속에서 사는 거잖아.
곧이어 익숙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가 모래 바닥 위로 쏟아지듯 몰려들더니 스필의 주위를 휘감으며 돌기 시작했다. 솔트로우의 가라앉은 부두에서도, 개시제의 등대 암초 아래에서도, 어제 결계 위에서도 봤던 바로 그 광경이었다. 물고기들은 스필을 피하기는커녕 떼의 한가운데에 스필을 품고 함께 흘렀다. 거기다 유유히 지나가던 바다거북이 제 발로 다가오자 스필은 거북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고는 앞지느러미를 마주 잡고 악수까지 했다. 거북이 도망도 안 갔다. 오히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필 곁을 한 바퀴 맴돌았다.
로미오는 물속에서 멍하니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빛났다. 스필은 에메랄드빛 바닷속에서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수면에서 부서져 내린 햇살이 전부 저 애한테만 쏟아지는 것처럼.
번지점프 때 푸른 빛이 맴돌던 눈. 밤하늘로 뻗던 익숙한 손짓. 손끝에 입 맞추던 열대어. 잡으면 줄어드는 소모. 그리고 지금 이 광경까지. 머릿속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외면해 온 기묘한 순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로미오는 이번에도 그 생각의 꼬리를 거칠게 끊어냈다. 이번으로 몇 번째인지 세지 않겠다. 매번 그랬다. 그러지 않으면 무언가가 엇나가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는 팔다리를 크게 저어 스필의 곁으로 헤엄쳐 갔다. 물고기 떼가 잠깐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사이, 로미오는 스필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물속에서 입을 뻐끔거렸다. 마법약은 숨은 쉬게 해줘도 목소리까지 멀쩡하게 전해주지는 않아서 뭉개진 소리가 물거품과 함께 터져 나왔다.
Romeo
"...friends with the water, my ass!" (...물이랑 친한 정도가 아니잖냐!)
웅웅거리는 소리가 제대로 전달됐을 리 없지만 상관없었다. 로미오는 어이없다는 표정 반, 억누르지 못한 웃음 반으로 입가에 물거품을 왕창 뿜어내더니 스필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으로 저 앞쪽 바닥을 가리켰다. 하얀 모래밭 끝에서 보랏빛과 주홍빛 산호 군락이 시작되고 그 틈마다 말미잘과 흰동가리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필은 로미오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선 고개를 까딱였다. 웬 거북이가 두사람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길래 그녀석의 등껍질을 가볍게 붙들었다. 거북이는 산호 군락을 향해 나아갔고, 스필은 그닥 힘들이지 않고 그리로 갈 수 있었다. 거북이는 로미오에겐 영 관심이 없는 듯했다.
로미오는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 물을 저었다. 마법약 덕에 숨은 편했지만 이 속도로 계속 헤엄치려니 허벅지가 벌써 뻐근해졌다. 저 건방진 놈은 등에 사람을 태우고도 태연하게 지느러미만 나풀거리고 있질 않나.
그가 손을 뻗어 거북의 껍질 끝자락을 잡으려 하자 거북이 슬쩍 몸을 틀어 피해버렸다. 다시 손을 뻗으면 또 피했다. 아예 껍질 위에 올라앉은 스필을 향해 고개를 길게 빼더니 뺨을 스윽 문지르기까지 했다.
뭐야, 이 새끼가. 사람 차별하나.
Romeo
"Hey! Quit hogging the damn turtle!"
(야! 거북이 독점하지 마, 이거!)
물속이라 소리는 전부 뭉개져 나갔지만 로미오는 억울하다는 듯 물거품을 잔뜩 뿜으며 스필 옆으로 붙었다. 어쩔 수 없이 자기 힘으로 헤엄쳐 나란히 따라붙은 그는 거북 등에 얌전히 앉아 있는 스필을 흘겨보았다. 얄밉다. 이런 데에서 편안해 보이니까.
곧 산호 군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햇빛이 스며든 얕은 물밑에 보랏빛 뇌문 산호가 탑처럼 쌓여 있고, 그 사이마다 주홍빛 부채 산호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틈새로 흰동가리들이 말미잘 촉수 사이를 드나들었고, 손바닥만 한 파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산호 지붕 위를 훑고 지나갔다. 모래 위로는 성게가 느릿하게 그림자를 끌었다.
로미오는 그 앞에서 헤엄을 멈추고 스필을 돌아보았다. 자기 손으로는 절대 못 잡은 그 거북 등껍질 위에서, 스필이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이 바다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을 보여주겠답시고 데려왔는데, 막상 그 앞에 앉은 사람이 이 바다보다 눈부시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건 배운 적 없다.
로미오는 문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모래밭에 반쯤 박혀 있는 손바닥 크기의 조개껍데기 하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다. 물속에서 동(動)의 형을 아주 조금만 흘려 모래를 걷어내자 결이 고운 분홍빛 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첫날밤 해변에서도, 가라앉은 부두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이 애 앞에서는 자꾸만 주워다 주고 싶은 게 생긴다. 어떤 걸 가져다주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세상을 품에 안겨준 다음엔 별을 따다 주고 싶은 여자애였다. 받든, 받지 않든.
로미오는 조개를 손바닥에 얹어 물속의 미세한 잔해를 털어낸 뒤, 거북 위에 앉은 스필의 무릎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물속이라 아무 말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그냥 눈짓으로 받으라고 했다. 붉은 눈동자가 물결 따라 흔들리며 스필을 올려다보았다.
스필은 로미오가 내민 것을 순순히 받았다. 물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빛줄기에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석은 스필의 반바지 주머니로 들어갔고 주머니의 지퍼가 단단히 잠겼다. 곧 로미오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첫날 밤 해변에서 주운 조개들처럼 이 작은 것도 스필의 책상 어딘가에 놓일까. 아니면 책 사이에 끼워져 잊히지 않는 표시가 될까. 어느 쪽이든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우스운 만족감이 들었다.
그때 손이 잡혔다. 스필이 로미오의 손을 덥썩 쥐어 잡은 것이다.
물속에서 이어진 손길은 육지에서보다 더 이상했다. 피부 사이에 얇은 바닷물이 끼어 있었고, 손바닥은 미끄러운데도 붙잡힌 감각만은 놀랄 만큼 또렷했다. 로미오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스필이 이끄는 방향으로 몸이 부드럽게 끌려가자 눈을 크게 떴다.
바다거북이 길게 목을 빼고 로미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한 번 느리게 감겼다 떠졌다. 마치 네가 저 손을 잡고 있다면 어쩔 수 없다는 허락처럼 보였고, 로미오는 그 터무니없는 착각에 물거품을 몇 개 터뜨리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당겼다.
저 거북이, 방금 나한테는 관심도 없던 새끼가.
좋아. 인정받은 거다. 거북이 따위에게 인정받아 좋아하는 건 아니고. 절대 아니고.
Romeo
"Yeah, that's right. I'm with her."
(그래, 맞아. 나 얘랑 같이 있거든.)
산호 군락은 가까이서 보니 유리 공예품처럼 얇은 결을 겹쳐 놓은 도시 같았다. 보랏빛 둥근 산호 위로 햇빛이 망처럼 걸렸고, 주홍빛 부채 산호는 물결을 따라 조용히 접혔다 펼쳐졌다. 작은 물고기들은 두 사람과 거북 사이를 지나며 은빛 점선처럼 반짝였고, 모래 위에는 조개가 숨을 쉬듯 아주 느리게 입을 벌렸다 닫았다.
로미오는 잡힌 손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산호 틈새를 가리켰다. 푸른 줄무늬 물고기 한 쌍이 투명한 새우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조금 옆에서는 노란 해마가 해초 줄기에 꼬리를 감고, 얼굴만큼이나 당당한 표정으로 물결을 견디고 있었다. 스필에게 보여주려던 바다였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나란히 떠 있으니, 이 풍경을 보여주는 쪽이 자신인지 아니면 스필 덕에 이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쪽이 자신인지 애매해졌다.
로미오는 스필의 손등을 엄지로 한 번 가볍게 눌렀다. 그러고는 산호 군락 너머, 햇빛이 더 깊게 떨어지는 모래 협곡 쪽을 가리켰다. 저 아래에는 관광객용 부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작은 자연 아치가 있었다. 물살이 잔잔한 시간에만 빛이 제대로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번엔 자기가 앞장서겠다는 듯 로미오는 스필의 손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몸을 틀었다. 거북이 그 옆에서 느릿하게 따라붙었다.
스필은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린 조개의 안에 있는 진주를 손으로 콕 찌르던 중이었다. 동그란 것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갈 하진 않았다. 로미오는 조개가 품고 있던 작은 진주 쪽으로 스필의 손끝이 닿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조개는 놀라지도 닫히지도 않고 아주 느리게 물결을 들이마시듯 벌어져 있었고, 그 안의 둥근 빛은 햇살을 받아 우윳빛으로 가만히 흔들렸다. 스필은 그것을 떼어내지 않았다. 콕, 하고 찔러 확인만 했다. 마치 길가의 풀잎 끝에 맺힌 물방울을 건드려보는 사람처럼.
그래서 로미오는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굳이 그대로 두는 태도. 예쁜 걸 보면 사주고, 가져다주고,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싶은 자기와는 정반대였다. 저 조개도 그랬다. 저 거북도 그랬다. 저 바다까지도, 스필의 손가락 아래서는 소유물이 아니라 잠시 마주친 찰나 같았다. 어쩌면 로미오 자신도.......
그는 잡은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빼앗아 오고 싶었다. 조개 속 진주 따위는 모르겠고, 스필의 얼굴을. 시간을. 스필의 삶을. 다만 그런 생각은 입 밖으로 내기엔 너무 멍청하고, 또 너무 위험하니까 로미오는 턱만 조금 치켜들 뿐이었다.
자연 아치는 산호 군락 너머의 낮은 모래 협곡 사이에 있었다. 오래된 바위가 파도에 깎여 생긴 둥근 문은 사람 둘이 나란히 지나갈 만큼 넓었고, 표면에는 유리이끼처럼 옅게 빛나는 해조와 손톱만 한 조개들이 붙어 있었다. 위쪽 수면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아치 안쪽으로 길게 꺾여 들어오자, 물속에는 금색과 초록색의 얇은 장막이 겹겹이 드리웠다. 그 빛 사이를 지나던 물고기 떼가 한순간 방향을 바꾸며 은색 사슬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로미오는 아치 입구 앞에서 멈추고 스필을 돌아보았다. 물속이라 말은 제대로 닿지 않으니 그는 손짓으로 먼저 아치 안쪽을 가리킨 뒤, 다른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 치고는 엄지로 앞을 가리켰다. 내가 먼저 간다. 따라와. 말 대신 대충 그런 허세였다.
바다거북은 그 옆에서 고개를 느리게 들었다. 검은 눈이 로미오를 한 번 보고, 스필을 한 번 보았다. 마치 사람 둘이 바닷속 돌문 앞에서 무슨 의식을 치르는지 심사라도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미오는 그 시선이 괜히 마음에 안 들어 거북 쪽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Romeo
"Don't look at me like that. I found this place."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여기 찾은 건 나거든.)
물거품만 보글보글 터졌다.
그는 스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아치 안으로 들어섰다. 빛의 장막이 어깨와 팔을 차례로 스치며 지나갔다. 햇살이 물 때문에 부드러워졌는데도 피부 위에서 얇은 천을 문지르는 것처럼 감각이 있었다. 발밑 모래에는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작은 새우들이 투명한 몸을 접었다 펴며 바위 그늘로 숨어들었다.
아치의 한가운데에 도착하자 로미오는 멈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위쪽의 햇빛이 둥근 문틀을 통과해 물속 바닥에 완전한 원을 만들고 있었다. 개시제 밤에 자신이 허공에 그려 닫아버렸던 빛의 원과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누가 완성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닫혀 있었다. 파도 때문에 가장자리가 흔들리고, 물고기 그림자가 지나가면 잠깐 찢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곧 다시 이어졌다.
로미오는 그 원 안에 떠서 스필을 보았다.
아, 씨발.
이런 건 보여주면 안 되는 건데. 보여주고 싶었다. 웃긴 일이다. 솔트포드의 수조도, 밤비행도, 침몰한 부두도, 전부 자기가 가진 것처럼 굴며 데려갔는데 막상 이렇게 바다가 스스로 만든 빛 앞에서는 자기 자랑이 조금 초라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자신이었다. 그 점만큼은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아치 너머에서 작은 그림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보다 훨씬 작은 새끼 바다거북이었다. 녀석은 큰 거북의 뒤에서 느리게 떠오르더니, 로미오와 스필 사이에 맺힌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스필 쪽으로 헤엄쳐 오려 했다.
로미오의 눈매가 즉각 가늘어졌다.
Romeo
"No. Absolutely not. One turtle was enough."
(안 돼. 절대 안 돼. 거북이는 한 마리면 충분해.)
전달되지 않을 항의가 물속에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큰 거북은 신경도 쓰지 않고 느릿하게 지느러미를 저었다. 물론 새끼 거북은 결국 스필의 손바닥 곁에 자리를 잡았다. 로미오의 항의 따위는 애초에 이 바다의 안건이 아니었다는 듯이.
그런데 스필이 멈췄다.
햇빛이 바닥에 그려낸 완전한 원의 한가운데였다. 연분홍 머리카락이 빛의 가장자리 안에서 금빛으로 물들고, 래시가드 자락이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스필은 그 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로미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의 텅 빈 듯한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알아본 눈. 오래전에 두고 온 물건을 길에서 다시 마주친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입술이 움직였다.
가만가만, 분명히 어떤 말의 모양으로. 물거품조차 거의 일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로미오는 숨을 멈추고 그 입모양을 읽어보려 애썼지만 물의 일렁임과 빛의 장막이 번갈아 시야를 흐렸다. 한 글자도 건지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뭐라고 하는 건데, 지금.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개시제의 밤이 떠올랐다. 미완성인 아홉째 형 앞에서 조각은 온전해질 수 없다고 말하던 목소리. 그때 자기는 허공에 멋대로 원을 마저 그려 닫아버렸다. 그런데 지금 스필은 누가 그리지 않아도 저절로 닫혀 있는 원 안에 서서, 그때와 똑같이 자기를 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모르는 채로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로미오에게는.
그는 물을 박차고 스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빛의 원 안으로 자기 몸도 절반쯤 들어섰다. 어깨 위로 햇살의 얇은 막이 내려앉았다. 로미오는 자기 귀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고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안 들려. 하나도 안 들린다고.
Romeo
"Say that again where I can actually hear you!"
(들리는 데서 다시 말해!)
물속에서 뭉개진 외침이 거품으로만 터져 나왔다. 제 말도 안 닿기는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은 로미오는 짧게 혀를 차더니, 검지로 스필을 가리키고, 자기를 가리키고, 마지막으로 머리 위의 일렁이는 수면을 가리켰다. 올라가자. 올라가서 그 말, 다시 해.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스필의 손을 잡았다. 새끼 거북이 손등 옆에서 꼬물거리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큰 거북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고, 로미오는 발끝으로 모래를 가볍게 차며 빛의 기둥을 따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면이 가까워질수록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고, 물의 천장이 은박지처럼 구겨졌다 펴졌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마자 로미오는 젖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한낮의 해가 수면 위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뱉어내고는, 뒤따라 떠오를 얼굴을 향해 몸을 돌렸다.
Romeo
"Okay. Now talk. What were you saying down there, in the middle of that light?"
(좋아. 이제 말해. 아까 그 빛 한가운데서, 뭐라고 한 거야?)
Spill
"...별 거 아니야. 그냥..."
스필은 수면을 바라봤다. 방금 치고 올라온 곳을.
Spill
"로미오가 그때 닫아준 거랑 똑같아서. 계속 있고, 아니... 보고 싶다고 했어."
귓바퀴부터 목덜미까지 열이 확 치솟았다. 햇볕 때문이라고 우기기에는 바닷물이 이렇게나 시원했다. 로미오는 젖은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거칠게 쓸어내리고는 괜히 수면을 손바닥으로 철썩 쳤다. 물방울이 하얗게 튀어 올랐다.
별 거 아니긴 뭐가 별 거 아니야. 존나 크게 별 거잖아, 바보야.
Romeo
"...You can't just say stuff like that underwater where I can't hear it. That's cheating."
(...그런 말을 물속에서, 내가 못 듣는 데서 하는 게 어딨냐? 그건 반칙이잖아.)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제멋대로 작아졌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뱉고 시선을 수평선 쪽으로 홱 돌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스필에게로 되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한낮의 물빛을 받아 평소보다 환하게 흔들렸다.
Romeo
"Fine. Then look at it as much as you want. The sun hits that arch like that every clear afternoon around this hour. I checked when I was a kid."
(좋아. 그럼 실컷 봐. 맑은 날 이맘때면 아치에 항상 저런 빛이 들어. 어릴 때 내가 확인해 둔 거야.)
"And if you want the other one... the one I drew. That one doesn't depend on the weather. You just have to call me."
(그리고 다른 쪽이 보고 싶으면... 내가 그린 거 말이야. 그건 날씨에 관계 없어. 그냥 나 부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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